12월 - 김이듬(1969~ )
저녁이라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 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과 망신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새 떼가 죽을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아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넘어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 수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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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으로 놔둬야 하는 것이 있다. 떠나간 사람을 붙잡지 말 것, 사색으로 보낸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 것, 바삐 지내려 하지 말 것, 잃어버린 시간은 사라진 상태로 그냥 남겨둘 것, 특히 기다릴 것, 기다리는 동안 낙관하지 말 것, 서투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 창백한 얼굴에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일 것, 구겨진 것을 반듯하게 펼쳐보려 하지 말 것, 단추를 다 잠그지 말 것, 셔츠를 빼내 입을 것, 봄이 오기를 희망하지 말 것, 지하철에서는 반드시 서 있을 것, 스포츠 신문을 사보지 말 것, 빈 갑을 발견해도 구기거나 밟지 말 것, 애써 괜찮은 척하지 말 것. 그래서 숨넘어가는 영혼을 그대로 둘 수 있었던 것일까? 시가 돌보는 어느 영혼이 있다면 그런 순간들은 아닐까?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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