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중략)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1926~ ) ‘성탄제’ 중에서
시골에서 자란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가진 것보다는 없는 것이 더 많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교육만이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주던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자식 공부에 대한 꿈만은 묵묵히 응원해주시곤 했다. 덕분에 대도시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도시에 터를 잡아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름 도시인의 삶에 익숙해진 듯해도 고향의 아버지에게 난 늘 시골길을 뒤로하고 유학의 길을 떠나던 모습으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아버지를 뵙고 돌아올 때면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냄새를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고향 어귀에 모신 후 멍한 가슴을 부여잡고 길을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달리 날 것이 없었지만 숨쉴 때마다 빨려 드는 것은 아버지의 옷자락에 묻어 있던 알싸한 흙 냄새였다. 어버이날을 지나면서도 카네이션 한 송이 가슴에 달아드리지 못하고 묘비 앞에 그리움을 놓아드려야 하는 지금, 유년의 기억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건 아버지의 옷자락에 묻어 있던 고향의 흙 냄새뿐이다.<이용구 중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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