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문태준(1970~)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움큼, 한 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
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 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 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이별, 그것도 최후의 이별.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곳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기에 그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기에 그곳이 먼 곳이라는 것을 안다. ‘먼 곳’은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어떤 실재. 언어는 실재를 다 담지 못하기에(라캉) 늘 언어 곁을 맴도는 잉여의 여운. 먼 곳이라는 말.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젓갈-이대흠(1968~ ) (0) | 2017.09.03 |
---|---|
염소의 저녁 -안도현(1961~ ) (0) | 2017.09.03 |
다시 아침-도종환(1955~ ) (0) | 2017.09.03 |
가을 소묘-함민복(1962~) (0) | 2017.09.03 |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김광규(1941~) (0) | 2016.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