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염소의 저녁 -안도현(1961~ )

~Wonderful World 2017. 9. 3. 08:47

염소의 저녁  
-안도현(1961~ )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 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 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할머니와 염소가 나누는 우정과 갈등, 애정의 섬김이 아름답다. 염소는 가히 할머니의 반려동물, 아니 그냥 반려자인 듯. 할머니가 잡고 있는 줄이 식기 전에 얼른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염소는 또 약자 보호를 아는, 할머니 슬하의 착한 피붙이가 된다. 뿔 가진 염소와 뿔 없는 할머니가 서로 섬기면서 우주 속의 한 식구가 되어 살아가는 이 눈물 나는 가족 드라마. 따뜻하다.
 
<김승희 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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