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 Ⅱ
-이세룡(1947~ )

1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빈속에서 소리가 나는 건
뱃속의 녹슨 파이프를 쪼아대는 딱따구리 때문이다.
빈 지갑 속에서
채플린이
낡은 바이올린을 켜기 때문이다.
2
이 세계에 영원한 것은 두 개밖에 없다.
반찬 없이 먹는 밥의
슬픔과
밥과 고기반찬이 마주 볼 때 찢어지는 웃음.
이세룡 시인은 영화라는 장르를 시라는 장르에 혼합한 포스트모던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영화처럼 시각적인데 현실을 찌르는 아이러니의 단검을 지니고 있다. 채플린의 영화와 더불어 ‘나의 청춘 마리안느’ ‘산체스네 아이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 불후의 명화들이 그의 시에 포개진다. 시인은 그중 채플린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인생의 한복판에 떨어진 새똥 같은 콧수염’의 채플린은 가난이나 소외, 현대의 고독이나 좌절, 눈물 나는 웃음 등에서 시인과 스토리를 공유한다. ‘절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웃는다.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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