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은신처-박서영(1968~2018)

~Wonderful World 2018. 2. 23. 13:38
은신처  
-박서영(1968~2018) 
 


숨을 곳을 찾았다

검은 펄 속에 구멍을 내고 숨은 지렁이처럼 
침묵은 아름다워지려고 입술을 다물었을까 
분홍 지렁이의 울음을 들은 자들은 
키스의 입구를 본 사람들이다 
그곳으로 깊이 말려 들어간 사랑은 
흰 나무들이 서 있는 숲에서 통증을 앓는다 
입술 안에 사랑이 산다 
하루에도 열두 번 
몸을 뒤집는 붉은 짐승과 함께 
 
 
사랑의 화살에 적중당해 피 흘리는 이 사람의 선택은 숨는 것이다. 숨길 수 없는 것을 숨기려고 사랑은 침묵이 되었다가, 견디지 못해 금세 울음으로 변한다. 이 입속의 검은 숲에서 울음은 또 통증을 붙잡고 신음이 되는 거겠지. 신음의 뿌리가 신열이기에, 입 맞추고 싶어 하는 사랑은 말을 잃고 꿈틀대는 혀로 붉어지는 거겠지. 혀는 사랑의 언어이고 사랑의 몸이다. 죽을 것도 살 것도  같아서 몸은 웅얼거린다. 사랑이여 놓아다오. 아니, 부디 놓지 말아다오. 
 
<이영광 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