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그런 저녁 - 박제영(1966~)

~Wonderful World 2018. 3. 18. 01:21
그런 저녁                
-박제영(1966~ )
 
시아침 3/16

시아침 3/16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시누대가 저리 흔들립니다
새가 날아간 후에도 댓잎이 저리 흐느낍니다
내 생애 전부를 흔든 사람
내 생애 전부를 울린 사람
대숲 사이로 옛사랑이, 옛 문장이 스미어
붉은 노을로 번지는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모처럼의 산책이라 시 한 수 읊은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도대체 옛사랑이 누구냐고
그 사람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옛사랑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노을 사이로 당신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붉어도 좋은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바람 지나간 뒤에도 시누대를 흔드는 것이 바람이듯, 사랑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삶을 흔드는 것 또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은 노을을 보며 그걸 막 깨닫고, 이제 곧 그걸 알게 될 다른 한 사람은 노을에 젖어 캐묻는 중이다. 안 그래도 사랑하는데, 저렇게 붉게 물든 얼굴로 뜨겁게 묻고 있으면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 
 
<이영광 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그런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