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Wonderful World 2019. 2. 16. 13:28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송찬호(1958~  )
  
시아침 1/22

시아침 1/22

우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니는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노인들은 건망증이 심하다. 유령들도 자신이 유령인 줄 모른다고 한다. 잘 잊는 상태에서 임종을 맞으면 그리 되는 걸까. 할머니들은 사탕이나 과자를 궤짝 같은 데 두었다가 손자 손녀들에게 건네주곤 했다. 이 집엔 아직 그 손의 자취가 남아 있다. 문득 궤짝을 볼 때 들려오는 목소리. 할머니는 여전히 건망증의 힘으로 거기 살고 있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이 건망증은 화자의 것이다. 십 년이 지나도 떠나지 않았다는 착각. 착각을 일으킨 건 물론 애틋한 그리움이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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