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하늘말나리-길원옥 할머니께(박금아)

~Wonderful World 2019. 10. 2. 22:31



하늘말나리

            -길원옥 할머니께

    

박금아

 

     

  길원옥 할머니, 처음으로 불러봅니다.


  어느 해였던가요, 814일이었습니다. 우연히 일본대사관 앞을 지나는데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평양이 고향인 저의 시아버지께서 자주 흥얼거리시던 노래지요. 어찌나 구슬프던지요? “변함없이 자알~” 할 때는 저의 목젖도 같이 떨리고 말았습니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지요. 저녁 뉴스를 보고서야 그날이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었고, 노래를 부른 분이 할머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 앞 도서관에서25년간의 수요일이라는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열세 살 때 고향 평양에서 만주로 끌려가 위안부 피해자가 되셨다지요. 열일곱에 해방을 맞았지만 길이 막혀서 돌아갈 수 없었다고요. 옥수수, 번데기 장수를 하면서 아들을 입양해 키우셨고요. 미국과 유럽에서 악몽의 세월을 증언하며 일본 정부에 사죄를 요구하는 모습도 보았답니다.

  관악산 기슭에 피어나던 하늘말나리꽃이 떠오릅니다. 주근깨투성이를 하고도 하늘을 향해 얼굴을 빳빳이 들고 피어나던 모습이,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었던 지난날의 상처를 당당하게 내보이는 할머니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용기를 내기까지 가슴에 적었다가 지워버리기 몇 번이었을까요?

  책에서 여러 분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강덕경, 이용수, 김순옥, 이옥선, 박옥선. ‘위안부 피해자라고 불리는 이름들이지요. 그래도 이름을 찾은 분들입니다. 이름을 잃고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가족을 잃어버린 분들은요? 이국에서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다가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과거가 부끄러워, 가족에게 해가 될까 봐 고향에 가지 못하고 숨어 사는 분들 말이에요  

 

   지난겨울에 울산에서 만났던 두 분 할머니가 생각나네요. 간절곶에서 간월재로 가는 어느 시외버스 정류장 옆에서였어요. 난전에서 곡식을 팔고 계시더군요. 차가 오려면 제법 기다려야 했어요. 직접 만드셨다는 찐쌀을 사서 정류장 간이 부스로 갔습니다. 의자에 앉아 찐쌀을 씹으며 할머니들이 장사하는 모습을 구경했습니다. 참 평화로웠습니다. 고운 몸짓과 도란도란한 말투가 두 손 꼭 잡고 세월의 강을 잘 건너온 부부 같았습니다. 자매시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합니다. 친구 사이냐고 했더니 그도 아니라 합니다. 그럼 동업자냐고 했더니 우리는 여자 부부야.” 하며 웃으시는 겁니다. 버스는 한참을 연착했습니다. 이것저것 여쭈었지요. 의령과 거창이 고향이며 두 분 다 아흔이 가까웠다는 것, 남자가 무서워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 신불산 아래에 집 한 칸 마련해놓고 함께 산 지 오십 년이라는 정도였지요. 뜨문뜨문 들려주던 그 말들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지금 왜 그분들이 생각나는 걸까요? 위안부 피해자는 10만에서 20만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더군요. 신고한 할머니들은 겨우 238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다 어디에 계실까요? 지하철 역사 안에서 더덕을 까는 할머니, 혼자 사는 윗집 할머니, 종일토록 말 한마디 없이 공원 의자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소녀 시절 제 단짝 친구의 어머니일 수도요.

  얼마 전에 영화 김복동을 보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계셨습니다. 의식이 없으신 듯했습니다. 평소에는 말씀이 없으신 분께서 계속 되뇌시더군요.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열세 살에 떠나왔으니 사무치도록 그리웠을 테지요. 고향의 어머니, 동무들, 앞산의 진달래, 뒷산의 산토끼, 여우. 정부는 단돈 10억 엔에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다시는 거론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버렸습니다. 공식적인 사죄 한 번 받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너무 아파 노래를 하셨다지요그래도 할머니께서는 슬픔으로 다른 슬픔을 보듬었습니다. 베트남의 전쟁 피해 여성들을 만나 용서를 구하고 위로했습니다. 정부를 대신해서 말이지요슬픔에도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하늘말나리가 꽃을 더 높이 피워 올렸네요. 꽃이 서 있는 자리를 가만히 만져봅니다. 축축이 젖은 땅이 할머니가 평생토록 흘린 눈물 자리인 것만 같아 하릴없는 저는 손바닥으로 볕 한 줌을 떠서 다독여줄 뿐입니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 흘러나오던 노래가 들려옵니다. 할머니, 이제는 더 큰 소리로 할머니의 노래를 불러주셔요.

 

 빈들에 마른 풀 같다 해도/ 꽃으로 다시 피어날 거예요// 누군가 꽃이 진다고 말해도/ 난 다시 씨앗이 될 테니까요// 그땐 행복할래요/ (중략) // 흙으로 돌아가는 이 길이 때로는 외롭고 슬프겠지만// 다시 들판에 꽃으로 피어나/ 내 향기 세상에 퍼질 테죠// (중략)

               -노래 윤미래 부분

 

                                                                           《한국산문》201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