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들, 시인들

김수영시인님

~Wonderful World 2020. 6. 3. 06:51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6월 16일 사망하였다. 김수영이 태어날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긴 했지만, 유년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김수영의 백부 김태흥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집안의 장손이나 다름없었던지라 김수영은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1]

선린상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시인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을 외워 읽을만큼 영어 실력이 유창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일제 치하에서 성장했던 한국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일본어에 유창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가 쓴 시나 에세이 중에서는 완전 일본어로만 작성된 글도 간혹 보인다.[2]

이후 일본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다가 8.15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심영 등과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잠시 수학했으나 졸업을 하지는 않았으며,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6.25 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한다. 그러나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고 3년 만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민간인억류자로 석방되었다. 이후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김수영이 시대와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참여라는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나름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은 4.19 이후의 일이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김수영은 여전히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버젓한 직장을 가지지 않았으며, 시·시론·시평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성격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수능 단골이 되는 계기가 된다 .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문우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귀가하던 중 과속버스에 치였다.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을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6월 16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신동엽이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弔辭)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렇게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3]

 

김수영(시인) - 나무위키

당대의 상황을 비판적이고 철학적으로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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