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1961~ )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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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웠지요? 무슨 시가 이래. 이걸 시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네 말씀 드리겠습니다. 분명 시입니다. 시 중에서도 가장 최근의 경향을 대표하는 시이지요.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언어입니다. 일종의 언어에 대한 불신인 셈이요. 이것이 깊어지면 시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회의에까지 이릅니다. 이제 의미는 존재 혹은 세계라는 지시 대상과 무관해진 것이지요. 환상이 최근의 트렌드가 된 것도 같은 까닭입니다. 의미가 해체되고 사유의 주체가 분열된 언어는 결국 기표(글자)의 미끄러짐의 유희만 계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시인은 전대의 관습적인 미학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학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지요. 자신 이전의 것에 낙인을 찍고 단절과 파괴를 통해 자신의 욕망으로 기쁨을 창조하지요. 따라서 시가 ‘감동’과 ‘진실’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독해법입니다. <박주택ㆍ시인>
‘개울가 눈 오는 풍경’ -김영남(1957~ )
느티나무 집
부엌 아궁이에서 불 지피던 아낙이
우는 아이 달래러 방에 들어갔군요.
느티나무 지붕 굴뚝에서
긴 손이 포근하게 나오는 걸 보니
그 손 또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라 아이들
기저귀까지 갈아주고 있는 걸 보니
이윽고 온 하늘 메우는
저 향기로운 파우더, 파우더…
예쁜 개울 토닥이다가 아낙도
함께 잠들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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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평화로운 풍경. 느티나무가 당산나무처럼 집을 지켜주고 있는 개울가.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던 아낙이 우는 아이를 달래러 방에 들어간다. 그때 굴뚝에서는 연기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라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아준다. 이윽고 온 하늘을 메우는 눈. 마을을 덮고 아이의 칭얼대는 울음을 덮고 시름을 덮는 눈. 아이를 토닥이다가 아낙도 함께 잠들어버린 지붕을 덮고 있는 눈. 참으로 화해로운 풍경. 천상과 지상, 모성과 울음, 불과 물이 어우러져 울려 퍼지는 조용한 생의 부스럭거림들. 우리는 욕망이 시키는 대로 마음을 따르다 수많은 평화를 잃는다. 수많은 평화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며 불화의 어리석음을 가르치지만, 평화도 생명이 있어 전쟁만큼 의지가 있을 때 찾아온다. 평화는 싸움이며 희생이며 모든 울음을 덮는 눈이다. <박주택·시인>
‘걸친, 엄마’ - 이경림(1947~ )
한 달 전에 돌아간 엄마 옷을 걸치고 시장에 간다
엄마의 팔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팔을 꿰고
엄마의 목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목을 꿰고
엄마의 다리가 들어갔던 구멍에 내 다리를 꿰!
고, 나는
엄마가 된다
걸을 때마다 펄렁펄렁
엄마 냄새가 풍긴다
-엄마……
-다 늙은 것이 엄마는 무슨……
걸친 엄마가 눈을 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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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子游)가 공자께 효에 대해 묻자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효라는 것은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개와 말 같은 짐승까지도 집안에서 함께 먹여 기르고 있으니, 공경하지 않으면 어찌 부모와 짐승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자하(子夏)가 공자께 효에 대해 묻자 말씀하시기를 “부모의 표정을 보고 알아서 행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수고를 대신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드시게 하는 것만으로 어찌 효도를 다할 수 있겠는가?” 나뭇가지가 고요하기를 바라나 바람이 그쳐주지 않고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으니 살아 계실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한 달 전에 돌아가신 엄마 옷을 걸치고 시장에 갈 때 펄렁펄렁 걸을 때마다 옷에서 엄마 냄새가 난다. 엄마의 죽음과 화해하여 만나는 이 슬픈 평화와 무거운 죄업. <박주택·시인>
‘검은 신이여’ - 박인환(1926~ )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데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로 뒤덮어주시오.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않도록.
하루의 1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검은 신이여
그것은 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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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함께 더불어 살아온 영토, 역사적 체험에 대한 공동의 기억, 조상과 가계 혈통에 대한 믿음 등을 공유하는 문화공동체로 고유의 정체성을 갖는다. 최근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이란 ‘상상된 정치 공동체’라는 입장을 근대성의 시각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민족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분단 상황에 말미암은 바가 크다. 6·25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민족사의 참극이다. 동족끼리의 전쟁이었던 6·25는 인간의 내면을 파괴하고 민족의 유대관계를 살상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 묘지에서 우는 사람, 폭파되는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사람. 포화가 뺏어간 가족과 친구. 그리하여 ‘검은 신의 자식인 전쟁’에 절규한다. 건물과 묘지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말도록 하고 이 처참한 슬픔 대신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달라! 박주택<시인>
‘검은 타이어가 굴러 간다’ - 정끝별(1964~ )
한 하늘을 떠메고
한 가족을 떠메고
한 몸을 떠메고 굴러 간다
길바닥에
제 속의 바람을 굴리면서
제 몸 깊이
길의 상처를 받아내며 굴러 간다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둥근 힘
돌아갈 길이 멀수록
더 빈 바람으로 제 속을 채운
한 떼의 검은 타이어들이
한나절의 피크닉을 끌고 간다
헛돌며 돌진하는
한 허공들이 일사불란하게 굴러 간다
저무는 모래내 사거리를
눈에 불을 켜고
닳고 닳아 고무 타는 냄새를 피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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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바퀴에 펑크가 났다. 바퀴란 무엇인가? 모체를 견디며 어디론가 이동하는 속도의 근원 아닌가. 바퀴에 펑크가 났다니. 그것은 운동성의 상실. 그러기에 바퀴는 비스듬히 기운 채 한 하늘을 떠메고, 한 가족을 떠메고, 한 몸을 떠메고, 불안하게 굴러간다. 안간힘을 다해 바람을 일으키며 길에 나 있는 수많은 상흔(傷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눈을 부라린 채 헐레벌떡 굴러간다. 찌그러진 몸으로 피크닉을 끝낸 가족을 끌고 간다. 바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어진 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어디론가 가야 하는 존재 혹은 삶. 그렇다면 펑크 난 검은 타이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상(內傷)으로 얼룩진 육체와 영혼. 그리하여 어떤 때는 평화롭고 어떤 때는 헛돌며 어떤 때는 길이 멀다. 검은 타이어 굴러 간다. 빈 바람으로 제 속을 채우며 눈에 불을 켜고, 고무 타는 냄새를 피우며 간다. <박주택·시인>
‘그릇’ - 오세영(1942~ )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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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완성된 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얻은 것을 통해 완성된다. 그릇은 완성체. 그러나 그릇 역시 불을 이겨 그릇이 되는 법. 언젠가 우리의 내면에서 눈부신 빛이 흘러나와 그 어떤 빛도 필요치 않듯이 지금 내면을 바라보라. 그 안에서 중심을 발견할 것이다. 그 중심이야말로 빛이게 만드는 생의 순간들을 영원하게 만든다. 그러나 깨진 그릇은 칼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가 날카로운 끝을 세운다. 그것은 눈 먼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 지금 나는 칼에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맨발. 찔린 “상처 깊숙이서 성숙”한 혼을 기다리는 맹목(盲目). 그리하여, 이 피학적이고도 극렬한 사랑의 아포리즘은 순환(循環)과 원융(圓融)의 중심을 화살처럼 관통한다. <박주택·시인>
‘나의 신(神)’ - 차주일(1961~ )
직립의 하루를 마치고 와불처럼 눕는다
얼굴과 모습을 지우고 살아남은 자가 내 몸을 맞이한다
그가 내 몸과 관절과 주파수와 조도를 다 맞추고 나면
내 용기를 부추기는 소리가 심장과 인화되고
온몸에 박혀있던 내 가식들이 사라진다
누구인가? 밤새 태초의 나로 돌려놓은 자
수직으로 기울여 높아진 나는 그를 바라보지 못한다
신(神)은 늘 배후에 있고 수평적으로 강림한다
내가 인간의 가장 낮은, 수평 이하의 자세인
태아와 같은 모습의 기도로 접신하는 이유는
내 암울을 버리는 유일한 고해성사이므로
내 암울이 전이될수록 신(神)의 모습은 짙게 드러난다
(내 그림자 속에 내가 누워있다니!)
내 미동에 태막이 꿀렁거린다, 내가 일어서면
나를 출산한 그림자가 태반처럼 뭉그러져 수평을 지켜낸다
내 이목구비와 몸짓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나의 신(神)은
내가 완전한 수평 이하로 태어난 뒤에야 나를 놓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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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은 상승하는 욕망. 수평은 평상심(平常心). 적어도 두 개의 자아. 즉 욕망하고자 하는 자아, 평상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아. 하여, 몸은 자아들 투쟁의 장소. 영혼은 투쟁의 기록보관소. 그렇다면 직립의 하루를 마치고 와불처럼 눕게 되는 침대는 성찰의 사원? 이곳에서 수직의 ‘나’는 수평의 ‘나’를 만나 가식을 버리고 성선(性善)에 든다. 그것은 진아(眞我)에 이르는 도정. 마음이란 이치를 총괄하고 도(道)를 보는 곳이 아니던가? 마음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따를 때 평화는 오는 법. 활을 만드는 사람 뿔을 다스리고, 물가에 있는 사람 배를 다스리며, 지혜있는 사람 마음을 다스리는 법. 그래서 마음보다 잔인한 무기는 없다지 않았던가.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신, 부처인 하심(下心),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있는 나의 신(神). 이 모두는 지혜를 부르는 태초들. <박주택·시인>
‘돌아가는 길’ - 문정희(1947~ )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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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참. 뭐라 할 말이 없으니. 부질없이 두 손을 모으지도 말고 물러서 있으라 했으니.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으니. 몸을 그치고 말을 그치고, 마음에 깊은 침묵을 지킨 고요함을 받아 유상(有常)과 무상(無常)을 넘어 진아(眞我)에 이르고 있는 인각사 부처. 생사를 끊었으니 이것저것이 없고 허공에 걸리는 바가 없도다. 이미 가고 돌아옴이 없으니,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으니 그저 본연만이 있을 뿐이다. 완성이라는 말을 하지 마라. 생사의 윤회를 얻어 대적(大寂)을 이루었으니 부처도 감옥이고 돌도 감옥이다. 오직 자재(自在)만 있을 뿐이다. <박주택·시인>
‘되돌릴 수 없는 것들’ - 박정대(1965~ )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이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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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쓸쓸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쓸쓸함이 마르면 나무들의 영혼이 됨을 이제야 알겠다. 가을을 노래했던 시인의 견고한 고독을 이제야 나는 조금 알겠다. 자작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드는 흠 있는 영혼들이 거주하는 이 지상의 거처. 나는 잎사귀들이 붉게 물들어 가는 이곳에서 너를 생각한다. 너의 얼굴에 부서지는 스산한 바람. 쉽게 떠나는 이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적막하고 쓸쓸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일생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흘러가서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 나는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끝내 사랑할 수 없다. 잘 가거라, 사랑아. 나의 맥박은 이제 동공에서 뛰어 기원도 없이 쓸쓸하고 이별의 순간까지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해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의 일부를 여기에 남긴다. <박주택·시인>
타관 - 배한봉(1962~ )
가을 나무로 친다면, 우리 고향집 뒤뜰의
불타는 감나무만 한 것이 있으랴
정오의 날빛을 퉁기며 붉게 채색되는 풍경의 시간들,
얼레가 풀려 하늘 높이 가 닿는 마음 한참 동안
어질머리로 견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채 익지도 않은 열매 몇 개 서둘고 떨구고 선
저 고층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
단풍 예쁘게 들었다고 이웃들은 한참이나 감탄하지만
타관에 뿌리박은 고단함 감추려고 기를 쓴 탓은 아닌지
가지 뻗을 데라곤 막막한 세월뿐이어서
희끗희끗 늙어 가는 망명정부 같다.
저 나무들 시들시들 흔들리는 잎을 보니 자꾸만
우리 고향집 뒤뜰의 감나무가 생각난다
상강 지나 입동 무렵
치렁치렁 매단 햇빛으로 대금소리를 내며
둥글게, 둥글게 불타던 열매, 열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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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저기를 말하기. 현실에서 상처 없는 과거를 말하기. 혹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을 말하기. 이는 지금의 고통을 무화(無化)시켜 새살을 얻고자 하는 낭만적 사유. 이 사유는 뿌리가 깊고 등치가 크다.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기 시작한 아득한 옛날로부터, 가까이는 현실과 이상이 균열을 일으킨 근대 이후. 따라서 분열, 단절, 불연속, 불확실 등은 오늘날의 단골 목록. 가을 나무로 친다면 고향집 뒤뜰, 정오의 날빛을 퉁기며 붉게 불타는 감나무만 한 것이 있으랴. 상강(霜降) 지나 입동(立冬) 무렵. 치렁치렁 매단 햇빛으로 대금 소리를 내며 둥글게 불타는 열매들. 채 익지도 않은 열매 몇 개를 서둘러 떨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저 아파트 단지 나무에 비하랴. 저 나무들 시들시들 흔들리는 것을 보니 희끗희끗 늙어가는 망명정부 같다. 절망만큼 깊어 생명으로 생명을 낳지 못하는 불임(不姙)의 타관(他關) 같다. <박주택·시인>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1961~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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