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들, 시인들

‘장자님 말씀’ 부분 - 김용민(1957∼ )

~Wonderful World 2008. 11. 18. 14:48

‘장자님 말씀’ 부분 - 김용민(1957∼ )

 

장자가 말했다던가

‘복수하지 말라

강가에 앉아

한 십년쯤 기다리고 있으면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 오리라’.

어떤 경우는

1년도 안 되어

모조리 떠내려 오고

어떤 때는

몇 십 년을 하염없이 기다려도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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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내밀한 부분 하나는 예기치 않은 기쁨과의 조우다. 예기치 않은 기쁨은 세렌디피티라고도 하던데 예기치 않은 슬픔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인간만사 새옹지마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변증법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기쁨을 위해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기쁨을 겪지 못하고 간 기형도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기쁨을 기다리지 못하고 간 최진실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박찬일·시인>
2008.11.10 00:43 입력

 


‘겨울산’ - 문현미 (1957~ )

 

절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을 정수리에 이고 가부좌 틀면

수묵화 한 점 덩그러니

영하의 묵언수행!

폭포는 성대를 절단하고

무욕의 은빛 기둥을 곧추세운다

온몸이 빈 몸의 만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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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데올로기 재생산’이라는 말이 있다. 입에 맞는 반찬에 젓가락이 더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반찬을 더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수요가 늘면 비싸진다. 자기이데올로기가 비싸진다. 자기이데올로기가 변이를 일으켜 인류의 DNA 염기서열에 변화를 초래할지 모른다. ‘자기이데올로기 세상’이 될지 모른다. ‘겨울산’은 남성적 시 같지만 여성이 쓴 시다. 나는 여성이 쓴 시라 해도 남성적 시를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남성이 쓴 시 중에서도 남성적 시를 좋아한다. ‘절언’ ‘영하의 묵언 수행’ ‘성대 (…) 절단’ ‘무욕의 은빛 기둥’들은 한겨울 산속에서 솔잎만 먹고 용맹정진하는 수도승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박찬일·시인>
2008.11.05 00:42 입력

 


‘취급주의 요하는 질그릇으로의 사람’ 부분 - 정재분 (1954~ )

 

내 안에서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

나 자신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삼킬 지경이라면

아들아! 잠시 도망하라

책 속으로 잠입하든지 여행을 떠나든지

영화를 내리 몇 편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만용을 부리는 몸을 고달프게 하여

무모에서 벗어나고 자신과 거리를 두어

타인에게 하듯 예의 바르게 대하라 

生의 秘意를

간파했다면 슬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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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비의? 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 이전과 이후가 다르게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시간이 정지해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아이들을 보아줄 일이다. 얼어붙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잠시 도망”가라고 속삭여줄 일이다. “책”을 권하든지 “여행”을 권하든지 “영화 (…) 몇 편”을 권하든지 할 일이다. “자신과 거리를 두어/ 타인에게 하듯 예의 바르게 대하라”고 말해줄 일이다. 무엇보다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라고 말해줄 일이다. <박찬일·시인>
2008.11.04 00:38 입력 / 2008.11.04 00:38 수정


부분 - 고은 (1933~ )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의 마을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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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는 마을 이름이다. 시에도 ‘사기’가 있을 것이다. 사기를 치지 않는다, 고은은. ‘토해놓다’라는 말이 적격일 것이다. 문제는 토사물이 화학적 작용을 거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미 ‘구성’된 토사물이라는 데에 있다. 그리고 신체(삶)의 일부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는 데에 있다.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시를 나는 ‘문의마을에 가서’에서 보았다. 압권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고 한 것. 인기척을 내야 비로소 돌아다본다고 한 것. 사는 데까지 살아보라고 한 것.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고 한 것. 뒤돌아본 죽음의 시선을 피할 장사가 없다고 한 것. 물뿐만 아니라 ‘눈’도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한 것. 죽음이 낮은 데라는 것. 죽음은 섭리라는 것. <박찬일·시인>
2008.11.03 00:41 입력

 


‘무늬들은 빈집에서’ - 이진명 (1955~ )


언덕에서 한 빈집을 내려다보았다

빈집에는

무언가 엷디 엷은 것이 사는 듯했다

무늬들이다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

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 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 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때로 서로 부딪치며

빈집을 이겨낸다

언덕아래 빈집

늦은 햇살이 단정히 모여든 그 집에는

무늬들이 매만지는 세상 이미 오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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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앉아 내려다보면 그 아래 집들이 고스란히 보인다. 장독대와 꽃밭의 꽃들, 유리창들과 현관…. 어떤 집 마당에는 샌드백이 걸려 있고, 또 멍멍개가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구조나 규모가 비슷비슷한 집들이라도 저마다 풍기는 느낌이 다르다. 거주자들의 취향과 성격과 생활 습관이 다르니까. 화자는 빈집에서 어떤 엷디 엷은 무늬가 떠도는 것을 본다. 거기 살던 이들의 마음과 기억들, 그들의 흔적들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아 시인의 눈에 잡힌다. <황인숙·시인>
2008.11.01 00:21 입력 / 2008.11.01 04:06 수정

 


‘그것이 아픔이라는 걸 모르고’ - 차창룡 (1966∼ )


아스팔트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를 주워

죽어가는 관음죽 화분에 올려놓았더니

도토리의 대가리를 뚫고

나무 한 마리 솟아올랐다

저러이 둥근 알 속에 사방으로 가지치는

인연이 숨어 있었다니

벌레들 허공 그리고 흙은

도토리에서 연방 내장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것이 아픔인 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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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장난으로 연못에 돌을 던지지만 그 돌에 맞은 개구리는 죽는다. 화자가 길에서 무심히 주워 들고 온 도토리를 죽어가는 관음죽 화분에 올려놓았더니, 그 매끄럽고 단단한 껍질을 뚫고 싹이 난다! 세상만사 인연이다. 화자가 한 짓과 ‘벌레들 허공 그리고 흙’이 연(緣)이고, 도토리에 내재된 것이 인(因)이다. 그 작은 도토리 알 하나도 사방으로 가지 치는 인연의 연결고리다. 화자는 그것을 미처 몰랐다. 알았더라면 도토리를 주워 들고 오지도, 관음죽 화분에 올려놓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화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픔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도토리 알 하나가 지구와 맞먹게 무거울 것이기 때문이다. <황인숙·시인>
2008.10.31 01:00 입력

 


‘잉여인간(剩餘人間)’ -조윤희 (1955∼ )


내 꿈들이 매달려 있는

내 몸은 무겁다

언제부턴가

내가 내 몸을 끌고 다닌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내 몸의 뼈가 더 이상 만져지지 않았을 때

내 몸에 살이 붙고

불어난 나의 탄력 없는 살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스럽게 서글퍼지는 것은

그것이 대책 없이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그 미끈덩거리는 삶의 손아귀에서

자꾸만 빠져나가려 하는

현실감 없는 내 육체가

아직도 땅을 밟고 서 있어야 한다는

직립해야 한다는

그 치욕(恥辱)

그 치욕(恥辱)의 무게는 의외로 근이 많이 나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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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추섬은 인간 위엄의 기호다. 그러나 화자는 그 직립을 치욕이라 생각한다. 줏대도 의미도 없이, 비속한 욕망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꼿꼿이 땅을 밟고 서 있자니 욕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삶의 목적도 의지도 없는 화자는 목적어를 가지지 않은 자동사처럼 무상한, 자동적(自動的) 삶을 살 뿐이다. 시인이여, 대개 인간은 잉여인간이라오. 이 시의 세계관에 공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동감이다. <황인숙·시인>
2008.10.30 00:59 입력

 


‘나는야 세컨드5-우리들의 리그’ 부분 -김경미 (1959 ~ )


세상은 단지 두 집안으로 나뉜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박찬호-마이너리그 때는 외로웠어요

혼자라는 생각에(마이너리그에는 사람 수도 훨씬 많은데……)

마이너리그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엘수록

목숨껏 화를 낸다

요즘 시 안 쓰나 봐요, 안부를 물으면, 속으로

경멸한다. 천한 것들. 밥 먹는 것 못 봤다고 요즘 통 식사 안 하시나 봐요 하다니

청탁이 없다고 시인이……

……열등감만 한 무기가 어디 있으랴

(……)

나라가 토끼 형상이라

우리는 유난히 눈들이 빨갈까 지구는

어디나 그럴까 우리가 아무래도 유난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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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에 훨씬 사람이 많은데 거기 속한 사람들이 더 외로움을 탄다는 아이러니! 비주류 의식을 갖고 있는 화자는 ‘열등감만 한 무기가 어디 있으랴’며 자신을 다잡고 위로한다. 화자의 그 개인성에, 주류에 속하고 싶은 욕망들이 팽배한 사회 풍경을 포갠 재미있는 시다. (황인숙·시인)
2008.10.29 01:30 입력

 


‘히로시마 미하라에서’ - 한성례(1955~ )


까맣게 묻어나는 정적 문득

생명 있는 것들이 그립다

바람조차 숨죽여 눈 뜨고 있는 봄 익은 한낮

순간정지의 경내는

햇살만이 몰려와 자글거리고

영원을 날아온 듯한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댄다

묘지 가득한 팽팽한 햇살에 쨍 금이 간다

그 틈바구니를 이름 모를 검은 새가

한 생의 작은 인연처럼

가는 선을 남기고 왔다 간다

단단한 공기 가르고 저만큼서 목쉰 기적소리가 촉각을 울려놓고 달아난다

숨쉬기조차 무거운 정법사(正法寺)

생과 사가 나란한 뒤뜰에는

수많은 묘석이 눈빛을 반짝인다

한 생의 수레바퀴 담담하게 굴러가는 소리

덜컥덜컥 들려오고 하늘 한 자락 잠긴

정물의 바다는 소리 없이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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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다른 관광객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1945년 8월, 원폭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사실을 떠올리고 멍해져 있었으니까. 순식간 수십만 명이 사라져버린 그라운드 제로, 참화가 벌어졌던 곳에서의 삶이란 무엇인지, 생명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불교적 상상력과 표현이 돋보이는 시다. <황인숙·시인>
2008.10.28 01:06 입력

 


‘봐라, 아이들이 소독차를 따라간다’ -조용미 (1962∼ )


소독차가 왔다

눅눅한 여름날 저녁

동네 아이들이 슬리퍼를 끌며 뛰어나간다

꽁무니에서 하얀 안개를 뭉텅뭉텅

뿜어내는 흰 차를 쫓아서

마술피리 소리에 혼이 나가

저녁 끼니도 잊은 채

집에서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피리 부는 사람이 몰고 온 수상쩍은 흰 차는

아이들을 몽땅 다 데리고

마을을 빠져 나간다

저녁 밥상에서 아이들의 밥이

식어가고 있다

소독차는 아이들의 어린 영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데리고

달아난다

하하하,

아이들이 웃으며 기뻐 날뛰며

따라가는 소독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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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한테 이런 시도 있다니! 산사(刪붇)나 쓸쓸한 바닷가나 고적한 길 위만이 아니라 어떤 정경이라도 시로 만들어내는구나. 마을에 소독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우르르 그 뒤를 쫓아 달리는 산문적인 풍경에 시인은 동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포갠다. 시에서 소독차가 데려가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의 어린 영혼이다. 소독차를 쫓아가는 동안 아이들의 육체를 키우는 저녁밥은 식어가지만, 그들의 영혼은 소독된다. <황인숙·시인>
2008.10.27 00:54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