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논’-조용미(1962~ )
눈 온 뒤 겨울 논바닥 내려다보면
인화문(印花紋)이다
빽빽한 문양을 찍고 백토를 채워넣은,
흰 눈이 덮인
논은 커다란 분청사기
들은 도자기 가득한 가마터
저 촘촘한 무늬
사이로
꼬불꼬불 몇 사람이 인화된다
먼 길 가는 검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허공에 인화되어 박힌다
귀얄문처럼 바람이 휘익
들을 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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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하나의 도자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발바닥이 간지럽다. 백자에서 청자로, 청자에서 분청한 사기로 구워지는 지구. 이 도시는 어떤 무늬를 위해 새겨진
상감일까. 나는 어떤 색상으로 내리찍힌 한 점일까. 누가 이 지구에 가득 술을 담아 두었을까. 안주로 애호박전 둥근 달을 부쳤을까. 짙게 옻칠한 우주의 상 위에 마음
이 젓가락처럼 딸깍거린다. 기차를 타고 휙 지나는 들판에, 새떼가 빼곡히 앉아 있다. 어느 장인의 솜씨기에 날아오르는 무늬를 다 새겼을까. 하루가 손물레처럼 돌아
가고 노을이 가마 속처럼 붉다. 이제 곧 도자기의 색깔이 바뀔 차례다. <신용목·시인>
2009.02.19 00:49 입력
‘스무살’ 부분 - 김민정(1976~ )
남이섬 특설무대에 오른 그 여자, 유미리가 앙코르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틀어쥐고 있다. 고맙습니다, 또 고맙습니다, 안개꽃 다발에 파묻힌 155cm의 미국산(産)
유미리가 울먹울먹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노래할 때 난데없이 야유의 휘파람과 함께 날아든 끈 풀린 군화 한 짝. 내 젊음에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스무 살 유미리의 하얀 미니 스커트에 찍힌 그래 그 지울 수 없는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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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한 권씩은 꽂혀 있는 노트. 때로 너덜하고 때로 희미해도, 은하수가 한 장씩 밤낮을 넘길 때마다 쏟아져 내리는 활자의 사금파리들. 어떤 기억은 생활의 사
막에서 동결 건조되고 어떤 기억은 운명의 지층에서 화석이 되겠지만. 아렸던 사랑아! 너만은 썩어주기를. 한 줌 흙으로 사무치기를. 그리하여 미니 스커트는 미니 스
커트인 채로 새하얗기를! 우리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그때 스무 살. 펼쳐 보면 늘 그대로인 끈 풀린 한 짝. <신용목·시인>
2009.02.18 00:4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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