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묵화(墨畵)’-김종삼(1921~1984)

~Wonderful World 2009. 3. 26. 10:13

‘묵화(墨畵)’-김종삼(1921~1984)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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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지나 밤 짧고 낮 날로 길어지며 농촌 일손 바쁘겠다. 언 땅 뒤엎는 쟁기질에 물 댄 논흙 몽글어 빗는 써레질. 소 또한 바쁘겠다. 종일토록 같이 일한 할머니와 소 함께 도란거리는 소리. 묵향 퍼지듯, 한지에 먹물 번지듯 우리네 서로 적막한 가슴속 촉촉이 적신다. 등산모에 담배 파이프 문 ‘시인학교 교장선생님’ 시인. 지극히 아낀 말로 그린 한 폭 정경이 할 말 다하게 하는 시의 모범. 색깔 없이 먹으로만 그린 묵화 담담한 맛이 삶 본디의 적막함까지 담고 있다. 행간에서는 워낭소리 달랑달랑 새 나오게 하면서.

이경철·문학평론가

2009.03.26 00:47 입력

 

‘쌀이 울 때’ - 고영민(1968~ )

 

마른 저녁길을 걸어와

천천히 옷 벗어 벽에 걸어두고

쌀통에서

한줌,

꼭 혼자 먹을 만큼의

쌀을 퍼

물에 담가놓으면

아느작, 아느작

쌀이 물 먹는 소리

어머니는 그 소리를 쌀이 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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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물 먹는 소리, 우는 소리 들은 적 없다. 그런데 이 시는 구차한 일상 곡진하면서도 차분한 형상화로 그 소리까지 다정다감하게 붙잡고 있다. 고된 일 마치고 빈 집에 들어와 홀로 밥 짓는 노총각 홀아비 아느작, 아느작 우는 소리. 의지할 데 없는 막막하고 마른 삶일지라도 아느작, 아느작 쌀이 물 먹는 소리. 서러워서 저절로 어머니 부르게 하는 그 편안한 소리 듣고 싶다. 이경철·문학평론가 2009.03.25 00:51 입력

 

 

 

 

‘동오리 15’-강민(1933~ )

 

그대 바람으로 떠나요

떠난 김에 훨훨 날아

산 넘고 물 건너

이 봄의 씨앗 실어다

거기에도 뿌려 줘요

샘물가 돌 틈에도

뒤울안 툇마루 주춧돌 사이에도

정자나무 그늘에 쉬는

그이들의 마음 밭에도

뿌려줘요, 봄의 씨앗

 

동오리의 봄 씨앗 날아

녹슨 철조망, 지뢰밭 넘어

그리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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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길가 둥둥 떠다니는 은빛 햇살 알갱이들. 민들레 버드나무 벌써 하얀 비닐우산 같은 홑씨 날리나 했더니. 철조망 같이 까칠한 담쟁이덩굴 봄볕에 씨방 터뜨리며 날리는 봄 씨앗. 배고프고 술 고픈 시인들 모두 다 거둬 주는 시단의 큰형님. 오늘은 그 너른 시심 봄 씨앗 동오리 북한강 바람결에 북녘으로 뿌리시나요. 이경철·문학평론가 2009.03.24 00:52 입력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 ~ 1837)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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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앞 카페에 새로 걸린 낯익은 시 한 편. 6·25 전후 구호품의 굶주림과 개발의 고난 연대 희망으로 이끈 시. 초라한 이발소, 국밥집, 목로주점. 막장 어둠 비추는 헤드 랜턴 쓴 광원 그림과 함께 액자로 걸려 환한 세상 깁게 하던 시. 오늘도 하나 둘씩 다시 걸리며 거덜 난 살림, 거덜 난 마음 깁고 있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가 된 시. 오늘도 시대와 국가를 넘어 세상과 인간과 희망을 깁고 있는 진정한 휴머니즘 시 한 편의 위엄.

이경철·문학평론가 2009.03.23 02:13 입력

 

‘머금다’-천양희(1942∼ )

 

거위눈별 물기 머금으니 비 오겠다

충동벌새 꿀 머금으니 꽃가루 옮기겠다

그늘나비 그늘 머금으니 어두워지겠다

구름비나무 비구름 머금으니 장마지겠다

청미덩굴 서리 머금으니 붉은 열매 열겠다

 

사랑을 머금은 자

이 봄, 몸이 마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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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바싹한 과자 물기 머금어 눅눅해 싫었다. 물기 머금은 습자지 붓글씨 번져 성가셨다. 그림자 머금은 산 뉘엿뉘엿 어두워져 외로웠다. 입 안에 넣고 얼른 삼키지 못하는 약같이 쓰디쓰던 언어 ‘머금다’. 이 시에서는 술술 넘어간다.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 머금고. 이제 천지가 봄 머금으니 꽃 환희 터져 나오겠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여태 쓰디쓴 고독. 이 봄 목마른 사랑 아니라 몸이 마르는 사랑 진정으로 머금은 자에겐. 이경철·문학평론가

2009.03.21 00:18 입력

 

 

‘ 아직도 못다한 사랑‘

작사: 한정선

작곡: 한정선

아티스트명 : 솔개 트리오

앨범명 : 연극중에서

 

오늘도 갈대밭에 저 홀로 우는 새는

내 마음을 알았나봐 쓸쓸한 바람에

아득히 밀려오는 또렷한 그 소리는

잃어버린 그 옛날의 행복이 젖어있네

외로움에 지쳐버린 내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하나요? 난 몰라요

이 가슴엔 아직도 못 다한 사랑

 

지난밤 꿈속에서 저 홀로 우는 여인

내 마음을 알았나봐 쓸쓸한 바람에

저만치 밀려오는 또렷한 그 소리는

잃어버린 그 옛날의 행복이 젖어있네

외로움에 지쳐버린 내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하나요? 난 싫어요!

돌아와요 아직도 못 다한 사랑

아직도 못 다한 사랑

‘산수유꽃’-고은(1933- )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무슨 천벌로

얼지도 못하는 시꺼먼 간장이란 말인가

다른 것들 얼다가 풀리다가

으스스히

빈 가지들

아직 그대로

그러다가 보일 듯 말 듯

노란 산수유꽃

여기 봄이 왔다고

여기 봄이 왔다고

돌아다보니

지난해인 듯 지지난해인 듯

강 건너 아지랑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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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비분강개, 자연을 향한 찬탄, 구분 없이 터져 나와 온몸으로 시가 되는 시인. 대뜸 철없이 피어난 산수유꽃에 일갈인가. 산수유꽃 아지랑이같이 아른거리는 시국. 혹독한 겨울 한번 나지 못하고, 가지마다 겨울 열매 빨간 상흔 그대론데, 여기 봄이 왔다 왁자지껄 피어나는 춘래불사춘인가. 이경철·문학평론가 2009.03.20 01:11 입력

 

‘오늘’-정채봉(1946~2001)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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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새소리 참 시끄럽네요. 춘정 못 이겨 짝찾고 부르는 소리 미워 쫓고 또 쫓는데. 아, 이 시 참 예쁘네요. 그 마음 하도 맑고 향기로워 수녀님 중창단도 노래지어 불렀네요. 그런 시인의 사랑과 동심을 김수환 추기경님은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큰 축복”이라며 먼저 별님이 된 시인 추모했네요. 정채봉님의 그 사랑, 그 동심으로 추기경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바보 별님』. 선종 후 출간돼 이 세상, 하늘 세상 다 향기롭게 하네요. 이경철·문학평론가 2009.03.19 01:01 입력

‘묵화(墨畵)’-김종삼(1921~198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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