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1935~ )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복사꽃 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특급열차로 바삐 달려본 사람들은 순식간에 목적지까지 다다르는 속도에 감동하게 될까. 날아가듯 달려가 어느새 종착역에 닿아버리는 특급인생이라면 누구라도 짙은 회한에 휩싸일 것이다. 그리하여 탄탄대로라 해도 끝이 훤한 도정에 서 있다면 발이 부르트도록 힘들게 걸어야 하는 오솔길의 인생으로 건너뛰고만 싶어진다.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유장한 산천에 파묻힐 터이니. <김명인·시인>
다정함의 세계 - 김행숙(1970~ )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작별 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검은 돌고래가 솟구쳐 오를 때무릎이 반짝일 때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선다
툭툭 끊어놓은 듯 생략해 버린 채 전개되는 시의 맥락들을 복원해 보면, 기지 넘치는 언어로 구축한 이 시인의 화법(話法)이 읽힌다. 함께 있고만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나는 결코 먼저 일어서고 싶지 않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라면, 그 아쉬움은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 오르”듯 온몸을 다한 안타까움으로 사무쳐올 것이다. ‘다정함’을 생각이 아니라 느낌 그대로 감각하는 순간들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김명인·시인>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1935~ ).hwp
물 통(桶) - 김종삼(1921~1984)
희미한풍금(風琴) 소리가툭 툭 끊어지고있었다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머나먼 광야(廣野)의 한복판 얕은하늘 밑으로영롱한 날빛으로하여금 따우에선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는 물음에 “땅 위에서는 영롱한 날빛을 시켜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준 일밖에 없다”고 대답하는 이 내용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 빈자리는 실용(實用)을 비워내고 환상을 채워 넣으려는 예술가의 자의식이 차지하는 여백이므로 투명하기만 하다. 그가 길어온 물(시)로 영혼의 기갈을 축여온 독자에겐 무위(無爲)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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