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도중에 고등학생 넷을 만났다. 지고 있어 열 받아서 동네 곱창 집에 가서 본다기에 답배 몇 가치 씩 주며 "지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응원해야 한다."며 그들과 시청 앞에 늦게 도착했다. 이미 2대 0으로 지고 있어서 자리를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을 외치며 가지 말라고 "지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응원해야 한다."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가로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대편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며 디엠디를 보며 이동했다. 시청 쪽 스크린은 너무 멀었고 반대편이 그나마 잘 보이는 곳에서 난 쇼를 했다. 시청쪽과 반대편 두 곳으로 나뉘어 응원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 통로를 시청 반대편 쪽을 의경들이 서 있고 시청쪽이 너무 멀어 안보이는 사람들은 반대편 화면을 앉아서 응원을 펼치고 있었고 응원을 유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열기에 흥분한 난 쇼를 시작했다. 서서 보자 의경들은 않아서 보라고 지시하길래 않아서 보다 내 뒷 편에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박수와 337박수와 "빅토리"를 유도하자 박장대소하며 한 일행 그러니까 두쌍 정도의 이십대들이 내 응원 유도에 응답하길래 위 세가지를 썩어가며 응원 박수를 유도했더니 박장대소하며 잘 따라주자 난 더 흥에 겨워 커플 인듯한 이들 둘을 지목하며 "마루치! 아라치!"로 바꿔 박수를 유도하자 더 박장대소하며 잘 따라 주었는데 의경들이 자꾸 않고 날 잘 따라주는 이들이 자리를 만들어 주며 앉으라 해서 앉고 보니 의경들이 서 있어서 화면이 3분의 1도 보이지 않아 나는 의경들에게 앉으라며 "싯 다운 폴리스", "경찰 앉아 주세요"를 외치자 좀전의 그 일행들도 내 외침을 같이 외쳐 주었다. 난 한 참을 외치다 지쳐 그 자리를 떠났다. 독일에서 왔다던 커플 사진 기자들은 관중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보도쪽 가장 자리는 장사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화면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장사치들은 축구보다는 장사에 여념들이 없었고 두 배 세 배를 불렀다. 예로 천원 할인점 '다이소'에서 천 원하는 고무 방석을 오천 원에 파는 걸 보고 아연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들도 많아서 난 좀 놀랬고 실망했다. 중계 해설자의 목소리는 함성들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을 유도했다. 디엠디로 중계방송을 들으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중에 우리나라의 첫 만회골이 터졌다. 광장은 환호의 도가니가 되었다. 전반전이 끝나자 고등학생 넷은 화장실 간다며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가져간 2천 100원 짜리 '진로 포도주'를 거의 원 샷으로 나발을 불었다. 취기가 갑자기 몰려왔다. 광장은 내가 듣보 보도 못한 가수의 노래가 여러 무대에서 들리고 사람들의 소음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난 내 엠피3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마침 흐르던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취기에 목청껏 불렀다. 취기가 좀 물러가는 듯해 정신을 차리고 서울광장 쪽으로 이동을 결심했다.
중간 통로를 지나다 좀 전과 비슷한 상황을 내가 연출했다. 몇 커플들이 즐거이 내 유도에 응하며 즐거워했다. 광장 뒷쪽도 도로변에는 경찰 버스들이 둘러싸서 안전사고에 대비한듯한데 잘 준비된 경찰들의 만반의 준비에 경찰들이 대견스러웠다. 광장 뒸 쪽 통로는 한국이 질거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청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역으로 가는 난 차쪽을 등지고 옆으로 걸으며 이동했다. 물밀듯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도중에 버스에 등을 기대고 화면을 보는 외국인들에게 난 말을 걸었다. "외어 아유 푸롬", "유 호프 코리아 윈?" 다들 거짓 없는 표정으로 "아이 호프 코리아 윈"을 외쳤다. 또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이들에겐 "돈 크라이 포미 아르젠티나" “크라이 포 미 마라도나"를 외쳤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나 뒤썩인 소음과 취기에 난 정신이 없었을 거다. 경기가 끝나고 안내방송은 "응원단 여러분 주변을 정리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주십시오"를 외쳤다. 그들은 전반전이 끝나고도 같은 맨트를 방송했다. 또 방송은 지하철 2호선 시청쪽 방향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니까 5호선 광화문역 쪽이나 4호선 명동역 쪽으로 유도했다. 현명한 유도였다. 하지만 명동역 보다는 회현역이 더 가깝고, 또 광화문쪽 보다는 좀 멀지만 1호선 종각역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닌데 그런 맨트는 없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주면정리 안내 방송이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쓰레기들을 정리해서시청 잔디밭에 올려놓으라고 방송이 나왔다. 나도 거의 다 정리될 때까지 도왔다.
먹다 남은 '아리수(무료로 사람들에게 나눠준 듯했다.)'와 먹다 남은 음료수 병들을 젊은 자원 봉사자들은 쓰레기봉투에 그대로 담고 있었다. 난 물과 음료수들을 비우고 쓰레기 봉투에 담기도 하고 묶어진 무더기 근처에 따로 던져 모으기도 했다. 먹다 남은 캔들은 비우고 발로 밟아 찌그려서 쓰레기 무더기 근처로 던지거나 발로 차서 대충 모았다.
잔디밭 안쪽에 모아진 쓰레기봉투 중 다 찬 것들은 도로변 쪽으로 날랐다. 어떤 건 엄청 무거웠다. 청소부들이 묶어서 모아진 쓰래기 봉투들을 차에 싣기 쉽게 큰 무더기를 만들고 일부는 차에 실었다.
아까 경기 도중에 명동에 "훼미리 노래방" 사장님(성함은 이자 한자 배자이시고 예순 넷의 연세에도 일요일 마다 축구게임을 세 게임 네 게임을 뛰신다.)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놀러 오라고 하셔서 청소가 거의 마무리되는 걸 보고 ‘훼미리 노래방’이 있는 명동역 10번 출구 쪽으로 출발했다.
도중에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십 여 명 무리지어 술판을 벌이는 곳에서 "대한민국" 박수를 유도하기도 하고 지나던 외국인과 썩인 거기서 잘하지도 못하면서 자신감 하나로 대화를 나누며 장난도 치며 맥주 반 잔 정도 마시고 명동으로 갔다. 그런데 내 핸드폰 두 대와 mp3 플레이어와 썬 글라스가 없었다. 주머니에 돈도 한 푼 없었다.(초저녁에 형님을 만나러 가는 도중 명동 외환은행 골목 네거리 근처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긴 장발의 초상화가의 외상이 되냐는 물음에 흔쾌히 그렇게 해 준다고 해서 그 힘든 모델이 되어 30여분을 생고생하고 초상화 값 그것도 삼 만원의 반 만 오천 원을 T-Money를 환불을 받아서 주고 나머지는 계좌송금을 약속했다. 그 바람에 주머니도 텅 빈 상태였다.) 노래방에 도착했더니 형님 혼자 바쁘게 일하고 계셨다. 주머니 사정이 좋았으면 노래를 부르며 술도 깨고 전철이 뚫릴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냥 축구 얘기를 짬짬이 나누다 분실 신고를 하러 명동 파출소에 갔다. 파출소 전화로 통신사에 분실 신고를 하는데 LG Telecom은 아예 야간이라 통화도 되지 않고 평일에 다시 접수하라는 ARS만 나왔다. 두 번인가 시도하다 실패하고 SK Telecom만 접수하고 경찰들에게 분실 접수증을 받고 생각하니 그래도 다시 가서 한 번 둘러나 보자 싶어 몸이 피곤하고 힘드니 경찰들에게 좀 태워 달라했더니 그리 멀지도 않다며 걸어가라 했다. 거듭 부탁했지만 거절하기에 걸어서 그곳에 도착해 둘러보니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잔디밭에서 한 시간여를 자고 900원 남은 T-Money로 집으로 돌아왔다. 무척 힘든 밤이었지만 색다른 경험의 크게 후회되지 않는 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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