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꽃 진 자리에’ - 문태준(1970~ )

~Wonderful World 2010. 8. 5. 13:27

‘꽃 진 자리에’ - 문태준(1970~ )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

빈 의자를 바라본다. 거기 누군가 앉았었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거기 앉아서 한숨 던지던 일이며, 거기 누군가 앉아서 유쾌하게 웃던 일이며, 거기 누군가 앉아서 하오의 창을 꿈에 잠겨 바라보던 일이며…의자는 자기의 허벅지 위에 앉을 그 누군가를 기다린다. 거기 꽃필 순결한 잠들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의자는 고독하다. 『월든』을 쓴 자연주의자 소로는 두 개의 의자만을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하나는 나를 위해. 저녁놀이 물드는 창 너머 하늘을 볼 나를 위해, 또 하나는 언제라도 찾아올 손님을 위해. 당신은 오늘 과연 몇 개의 의자를 당신의 방 안에 세워두고 있는가. 당신의 마음자리는 빈 의자가 되고 있는가. 붉은 꽃잎이 진 자리처럼 비었으나, 가득 찬 빈 의자. 빈 의자에 앉은 시 하나. <강은교·시인>

 

 

‘인천만 낙조’ - 조오현 (1932 ~ )

 

그날 저녁은 유별나게 물이 붉다붉다 싶더니만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그 늙은 어부가 그만 다음날은 보이지 않네

--------------------------------------------------------------------------------------------

죽음에 대해 조오현 스님처럼 이런 말없으나 수만(數萬) 말(語)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가. 낙조가 지는 ‘인천만’이라는 현실을 노래하면서도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주의자의 꿈. 갑자기 꿈과 현실, 상상과 현실이 손을 잡는다. 은유 때문이다. 은유의 이중성 때문이다. 밀물도 그냥 물결치며 모래를 껴안지 않는다. 썰물도 그냥 펄럭거리며 모래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들 사이에서는 수만 굽이의 한 사람의 생이 말없이 물결친다. 밀물도 썰물도 그 생을 안고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란 인천만의 ‘붉디붉은’ 낙조를 바라보면서도 그 붉음의 허리 속에서 지는 가슴 부여잡고 있는 사람 하나, 멀리서 보는 이가 아닐까? 지하철에서도 수평선을 보는 이가 아닐까. 그런 시를 꿈꾸자. <강은교·시인>

 

 

‘나이아가라’ - 문혜진 (1976 ~ )

 

살갗을 파고 드는 햇살 국경너머 젖은 거삼나무 비릿한 이끼 냄새 굉음으로 먹먹한 이 거대한 물의 장막 앞에서 나의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할 수 없을까? 악마의 목구멍에 추락하기 위해 밀려드는 이 황홀한 물의 심판대에서 조난 영화의 생존자처럼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할 수 없을까? 그늘진 계단에 앉아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내던 밤 폭포처럼 계단이 흘러내려 우리를 멀리 쓸어버릴 것만 같았지 (중략) 몇 시간 뒤의 날씨를 점치는 구름과 물보라의 미세한 떨림 위로 터지는 아찔한 신의 오르가슴, 여기서 나의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까 !

----------------------------------------------------------------------------------------------

젊은 시인, 문혜진이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고 외친다. 부서짐조차도 강한 생의 유혹인 장대한 폭포. 그 에너지 넘치는 폭포의 은유는 사랑에게로까지 달려간다. 그것은 ‘황홀한 물의 심판대’에 선다. 우리는 모두 ‘신의 오르가슴’에 떨리는 살을 맡긴다. 살아볼 만한 두 번째 인생! 시의 앞부분의 ‘없을까?’가 마지막 부분에서 ‘있을까!’의 긍정으로 슬쩍 바뀜을 놓치지 말라. 장엄하고 아름다운 신의 폭포인 이 삶. <강은교·시인>

 

 

‘산중문답 제3장’ - 신석정 (1907 ~ 1974)

 

<구름이 떠가며 무어라 하던?>

<골에서 봉우리에서 쉬어가자 합데다>

<바람이 지내며 무어라 하던?>

<풀잎에 꽃잎에 쉬어가자 합데다>

<종소린 어쩌자고 메아리 한다던?>

<불러도 대답 없어 외로워 그런대요>

<누구를 부르기에 외로워 그런다던?>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이 그립대요>

-----------------------------------------------------------------------------------------------

내 자랑 한마디 할까? 이 시는 700부 한정판으로 석정 선생이 말년에 출간하신 시집 『산의 서곡』에 실려 있는 시다. 나에게 있는 그 시집에는 659번째라는 숫자가 선명히 쓰여 있다. 1960년대 말이었지, 아마. <강은교 양에게>라는 붓글씨를 앞에 커다랗게 쓰신, 그래서 어느 날이던가, 그동안 아주머니가 된 내가 깜짝 놀라 다시 읽은, 유달리 크고 두꺼운 시집. 그뿐 아니었지. 석정 선생이 신진 시인인 나에게 보낸 그 두루마리 편지들, 자랑 삼아 들고 다니다 잃어버렸지만. 아무튼 그 시절엔 그런 일도 있었다. 원로 시인이 새파란 신인에게 시집을 보내고 팬레터를 하던. 유난히 산을 좋아한 석정 시인, 시대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진하게 느꼈던 석정 선생! <강은교·시인>

 

 

‘또 한여름’ - 김종길 (1926∼ )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후략)

-----------------------------------------------------------------------------------------------

노시인의 단정한 모습이 ‘젖은 뜰’에 어리는 시다. 이미지가 맑다. 그리고 여기 이미지에는 소리의 흐름이 마치 ‘소나기’처럼 급히 언어를 적시고 있다. 그 때문에 매미 소리가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매미는 다 알다시피, 3주간을 살러 지상에 나오는 안타까운 벌레가 아닌가. 그러니 그 매미 소리는 얼마나 다급한 외침일 것인가. 그 매미 소리와 소나기 소리가 어울리며 인생을 이미지화하는 시. 겨우 3주간 사는, 삶이라는 ‘매미 소리’여. 순간의 영원 같은 ‘소나기 소리’여. <강은교·시인>

 


‘꽃 진 자리에’-문태준(1970~_)외.hwp


 

‘꽃 진 자리에’ - 문태준(1970~ ).hwp
0.01MB
‘꽃 진 자리에’-문태준(1970~_)외.hwp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