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프리모 레비(1919~1987)
그대는 하필 이 숲속을 지나는구나.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 내가 외롭고 쓸쓸하지 않도록
하얀 눈 위에 어머니의 자궁 같은 발자국까지 남기며
하염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구나
(중략)
비록 짧은 세월이지만 난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용서나 기도 같은 걸 바란 적이 없다오.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역시 죽은 자가 하는 것이므로
그 또한 바란 적이 없다오.
그대에게 거듭 말하노니 제발 나를 용서치 말기 바라오.
단지 이 죄 많은 인생이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영혼이 늦가을 홀로 자작나무숲을 거닐 자유와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무덤 위로 별들이 뜨고 지고
철따라 풀꽃들이 끝없이 피고 지는 것이라오.
그리고 행여 따뜻한 세상의 가슴이 나에게로 온다면
내 영혼이 하얀 자작나무 속살처럼 거듭나는 것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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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17. 레비의 왼쪽 팔목에 새겨져 있던 수인 번호다. 그는 수인 번호를 묘비명으로 썼다...........
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광기를 견디기 위해 읽었다는 <신곡>의 한 구절.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손택수.시인>
‘묘비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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