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 최승호(1954∼ )
이 시퍼런 대파들은 꼿꼿하게 선 뱀 대가리 위에 하얀 야구공을 올려놓은 듯, 둥근 파꽃을 이고서 태양 아래 솟아 있다. 먼 곳으로부터, 이 야구공만 한 흰 꽃에 나비들이 너울너울 날아온다. 늙은 난장이별은 이런 방문객조차 없이 쓸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 별에도 한때 대파처럼 싱싱한 젊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별은 노쇠한 당구공처럼 별들의 무덤을 향해 굴러갈 뿐이다. 대파 앞에서 하얀 난장이별은 얼마나 창백하게 느껴지는가. 백색왜성 앞에서 대파는 얼마나 싱싱하게 느껴지는가. 우주가 크다고 해서 우리는 기죽을 필요가 없다. 설사 광막한 우주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의 지위가 개미 하나에 불과하다 해도 우리가 만약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주 또한 눈먼 우주에 불과했을 것이다. 개미의 몸을 받았다 치자. 그래도 우리는 개미입으로 먹고 개미다리로 걸어다니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메리카 들소 떼가 우리를 밟고 개미핥기의 혓바닥이 우리를 핥는다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자신이 하찮다고 자살하는 개미는 없다. 모든 본능은 억척스럽다. 그 본능의 힘으로 대파들도 저렇게 시퍼렇게 솟아 눈부신 하늘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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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넓다고 해서 우리가 기죽을 필요는 없다, 백색왜성 아래 대파는 야구공만 한 꽃을 싱싱하게 이고 있는데, 꼭 애기 업고 뛰어다니며 안팎의 일을 해치우는 한국 여자들 같은데. 그래, 아파트 평수가 좁다고 우리가 언제 기죽었나? <최정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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