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담장 - 박용래(1925~80)

~Wonderful World 2012. 9. 17. 03:50

담장 - 박용래(1925~80)


오동(梧桐)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怒)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옆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鴻來) 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梧桐)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원뢰(遠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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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아득하게 치는 천둥처럼 어느 날 문득 마음에 뒤늦은 뉘우침이 일어날 때가 있다. 발등에 오동꽃이 지듯 쳐오는 “더디고 느린 원뢰(遠雷)”. 대 이파리에 살랑 스치는 바람의 인연에, 오늘같이 구름이라는 것이 있었느냐 싶은 하늘을 본 인연에. 홍래 누이… 홍래 누이… 내 고종사촌 누이 같다. 아침마다 해거름마다 마루를 윤기 나게 닦고 또 닦던 내 누이. 잘 살고 있을까. 구미라던가 창원 어디 변두리에서 교회 일을 보는 남편과 아이 둘을 키우며 산다던데… 홍래 누이는 가고 없나 보다. 무슨 그리 큰 잘못이었겠는가. 무슨 그리 대수로운 노함이었겠는가. 담장 옆에 하늘 높이 솟아오른 오동나무. 그 가지에 보랏빛 오동꽃. 그 오동나무 베어 켜서 신접살림으로 가져가지도 못한, 젊어 죽은 홍래 누이. 검정치마, 흰 저고리, 옆가르마. 오동꽃처럼 툭, 떨어진 누이. 눈물의 시인 박용래가 문득 우리의 마음에 던지는 파문이다. 적요한 대낮의 둠벙, 잠자리 꼬랑지에 스치는 아득한 그리움의 파문! [장철문·시인·순천대교수]

 

담장-박용래(1925~1980)[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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