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나의 방랑 - 아르튀르 랭보(1858~1891), 황현산 옮김

~Wonderful World 2013. 5. 13. 15:34

나의 방랑 - 아르튀르 랭보(1858~1891), 황현산 옮김

 

 


나는 갔다네, 주먹을 찢어진 주머니에 지르고,

내 외투도 이젠 명색의 외투,

하늘 밑을 걸었으니, 뮤즈여! 나는 그대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네.

얼씨구! 내 얼마나 찬란한 사랑을 꿈꾸었던가!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 꿈꾸는 엄지동자, 나는 내 길에서 낟알처럼

시의 운을 땄다네.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

― 내 별들이 하늘에서 소곤소곤 말을 걸고

나는, 길섶에 앉아, 귀 기울였네,

이마에 내리는 밤이슬이, 힘을 돋우는

술처럼 느껴지는, 그 구월의 상큼한 저녁에,

희한한 그림자들에 둘러싸여 운을 밟으며,

칠현금이라도 켜듯, 한 발을 가슴께에 들어올려,

찢어진 구두의 고무줄을 나는 잡아당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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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하는 거 다하니, 맘대로 살거라 하시던 아버지에게 뺨 석 대 얻어맞고 가출했을 적에 사실 나, 갈 곳이 없었다네. 독서실에 숨어, 고작 이틀을 버텼을 뿐이라네. 그해, 미문화원점거농성 기사를 읽고 출렁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면 우리는 독서실 옥상에 모여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밤새 풀어 놓았네. 대입 시험을 목전에 두었건만 당구장과 술집을 전전했으니, 그건 명백한 가출이었네. 독서실 이름이 ‘희망’이었건만, 우리는 모두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네. 끝내 절망이라고 그 간판 아래 작은 글씨로 적어놓았네. 그해 겨울이 지나자, 대부분 학원가로 흩어졌네. 우리에게 가출이란, 가출 하면 떠오르는 그 무슨 자연 풍경이나 야반도주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네. 다만 삶이 가출이었고 가출이 삶인, 그렇게 집을 나오지 않았지만 집에 있다고도 생각하기도 어려운 한 철이었을 뿐이었네.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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