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꽃을 본 것은 -나희덕(1966~ )
마흔이 가까워서야 담배꽃을 보았다
분홍 화관처럼 핀 그 꽃을
잎을 위해서
꽃 피우기도 전에 잘려진 꽃대들
잎그늘 아래 시들어가던
비명소리 이제껏 듣지 못하고 살았다
툭, 툭, 목을 칠 때마다 흰 피가 흘러
담뱃잎은 그리도 쓰고 매운가
담배꽃 한줌 비벼서 말아 피우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족두리도 풀지 않은 꽃을 바라만 보았다
주인이 버리고 간 어느 밭고랑에서
마흔이 가까워서야 담배꽃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夏至도 지난 여름날
뙤약볕 아래 드문드문 피어있는,
버려지지 않고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을
처음 담배를 피울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흠모하고 있었다. 타앙! 굵은 시가를 입 왼뺨에 꽉 들어차게 문 그의 모습에는 전율이 감돌았다. 찡그린 미간은 어지간해서는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고수의 면모를 풍기는 것이어서, 총알이 어디로 향할지 상대방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배경음악(↗아↘아↗아↘앙~, 아─아─앙~)도 한몫을 단단히 거들었다. 간혹 이런 의문이 제기되었다. 시가의 연기 때문에 눈이 맵지는 않을까? 그러다 조준에 실패하면 어쩌지. 그러나 그는 고수여서 흔들림 없이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줄 알았고, 상대방을 제압하는 데 시가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벌써 깨달은 사람이었다. 뙤약볕 아래 드문드문 포진한 악당들을 제압하기 위해 얼마나 연마를 해야 했을까? 전문가가 되기 위해 얼마나 자주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을 것이며 자신의 모습을 저버려야 했을까. 변화하는 순간과 순간에는 늘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으며, 적잖은 고통도 따른다는 사실을 그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어 보였다.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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