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출근 - 조영서(1932~ )

~Wonderful World 2014. 3. 22. 07:36

출근 - 조영서(1932~ )


(아무 일도 없었으면…….)

그런 아침,

햇살이

부서진 남향집 마루,

그 바닥에

깔린

일상의 숨결…….

구두끈을 맨다.

습관처럼 무는 담배

자연(紫煙) 속의 뽀얀 오늘

어린 것들이

손, 손을 흔들면

조춘(早春)

아내의 연둣빛 치맛자락에 이는

금빛이여.

(정녕 아무 일도 없었으면??)


에즈라 파운드와 르네 마그리트를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가나의 윤반장과 그가 썰어주는 쫀득한 생선회 몇 점과 뽀얀 막걸리를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아무리 고급 벽돌로 벽을 지어 방을 만들어도 쓰이는 것은 벽이 아니라 텅 빈 방인 것을 잘 아는 시인입니다. 빈 것을 빈 것으로만 채우려 하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논리가 없습니다. 방금 머물렀는데 돌아서면 사라져버리는 햇살과 바람만 있습니다. 순간과 순간으로 직조한 텅 빈 하늘만 있습니다. 이른 봄, 남향집에 가족을 거느리고 사는 가장이 출근을 합니다. 어린 것들은 손을 흔들고 연둣빛 치마를 입은 아내가 환한 웃음을 짓습니다. 금빛입니다. 그래서 가장은 불안합니다. 잘 부서진 햇살이 그 남향집 마루에 계속 머물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스냅사진을 보듯 이 시를 봅니다. 대한민국 가장들의 불안을 봅니다. 자연(紫煙) 속에서 흔들리는 아름다운 불안입니다. <강현덕·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