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思春)
-정끝별(1964~)
말랑말랑한 곳에 털이 날 무렵
달리는 발바닥에 잔뿌리가 내릴 무렵
손거울에 돋는 꽃눈을 세다 풋잠에 들 무렵
뒷다리 떨며 뒷담을 기웃댈 무렵
꽃술에 노래를 꽂고 밥상에 앉을 무렵
때 묻은 풍선껌을 터뜨리다 토막잠에 들 무렵
날갯죽지에 바람이 들 무렵
창궐하는 것들과 한패가 될 무렵
부푸는 덤불숲을 헤치다 등걸잠에 빠져들 무렵
사로잡힌 일진(一陣)의 첫 봉오리들
사춘기―불안과 기대와 설렘과 흥분과 몰두와 일탈이 뒤섞인 채로 나타나는 시기. 비유들이 오종종 귀엽다. 마치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리를 들여다보며 그것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풋잠, 토막잠, 등걸잠’ 같은 우리말이 나긋나긋하게 눈에 들어온다. 무엇에 사로잡힌다는 것, 그것은 심장이 삶을 계속 의욕적으로 밀고 가라는 신호다. 무엇에 사로잡히지 못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본다. 가야 할 길보다 지나온 길을 바라보는 사람은 슬프다. 그래, 가야할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사춘기라는 거다.
<안도현·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사춘(思春)
-정끝별(1964~)

달리는 발바닥에 잔뿌리가 내릴 무렵
손거울에 돋는 꽃눈을 세다 풋잠에 들 무렵
뒷다리 떨며 뒷담을 기웃댈 무렵
꽃술에 노래를 꽂고 밥상에 앉을 무렵
때 묻은 풍선껌을 터뜨리다 토막잠에 들 무렵
날갯죽지에 바람이 들 무렵
창궐하는 것들과 한패가 될 무렵
부푸는 덤불숲을 헤치다 등걸잠에 빠져들 무렵
사로잡힌 일진(一陣)의 첫 봉오리들
사춘기―불안과 기대와 설렘과 흥분과 몰두와 일탈이 뒤섞인 채로 나타나는 시기. 비유들이 오종종 귀엽다. 마치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리를 들여다보며 그것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풋잠, 토막잠, 등걸잠’ 같은 우리말이 나긋나긋하게 눈에 들어온다. 무엇에 사로잡힌다는 것, 그것은 심장이 삶을 계속 의욕적으로 밀고 가라는 신호다. 무엇에 사로잡히지 못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본다. 가야 할 길보다 지나온 길을 바라보는 사람은 슬프다. 그래, 가야할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사춘기라는 거다.
<안도현·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사춘(思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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