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꽃씨와 도둑-피천득(1910~2007)

~Wonderful World 2019. 4. 4. 10:51
꽃씨와 도둑           
-피천득(1910~2007)
 

시아침 12/12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실용이 잔꾀와 협잡을 무기로 절도가 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도둑은 실용주의자의 극단적 전형이다. 그런 그가 오늘은 담을 잘못 넘은 것 같다. 마당엔 그저 아름다울 뿐인 꽃만 가득하고, 방에는 금붙이 대신 책들이 쌓인 집. 아름다움과 지혜는 장물이 되지 못한다. 도둑의 허탈을 이상한 수긍으로 바꿔놓는 힘을 시의 쓸모라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돈 안 되는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가을에 또 담을 넘겠다고 한다. 도둑의 입을 빌려 시인은 무용에도 어떤 쓸모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실용이 ‘용(用)’의 전부는 아니다. 부분이 전체를 참칭해선 안 된다. 실용이나 무용이나 다 어떤 유용(有用)이 돼야 한다. 저마다 얼마간은 실용주의자인 우리도 지금 무용의 집에 들어섰다. 저 어수룩한 도둑처럼 우리가 개심할 수 있을까. 아니, 잠깐 방심할 수 있을까. 
 
<이영광·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꽃씨와 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