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소곡(小曲) -박재삼(1933~97)

~Wonderful World 2019. 4. 10. 10:30
소곡(小曲)
 -박재삼(1933~97)

 
먼 나라로 갈까나.
가서는 허기져

콧노래나 부를까나.


이왕 억울한 판에는
아무래도 우리 나라보다

더 서러운 일을

뼈에 차도록 당하고 살까나.


고향의 뒷골목
돌담 사이 풀잎 모양

할 수 없이 솟아서는

남의 손에 뽑힐 듯이 뽑힐 듯이

나는 살까나.


마음의 물꼬를 어쩌면 이런 식으로 터서 이렇게 희한한 노래를 부를 수도 있는가. 어떤 모양의 억울함에 처하면 이러히 자신을 가누게도 되는가, 처용이처럼. 분노만도 아니고 좌절만도 아닌, 웃음도 아니지만 울음만도 아닌, 씁쓸하고 허전한 가운데 한 자락 청승스러운 쾌미(快味)가 없지도 않은 이 마음의 자리. ‘할 수 없이 솟아서는/ 남의 손에 뽑힐 듯이 뽑힐 듯이’ 살까보라고,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까. 그런데 알 것 같지 않은가 이 심정을. 일견 현실을 빗기는 듯한 그의 서정 시편들 바닥에 실은 깊은 가난의 상처와 비애가 놓여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박재삼은 일본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자랐으며, 시조시인 김상옥과 서정주의 문학적 유산을 자신의 방식으로 승계한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소곡(小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