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반고등어
이성목
오래 소장하고 싶다면
이 책은 표지만 읽어야 한다
첫 쪽을 쓰다가 고스란히 백지로 남겨둔
이 육신을 눈으로만 읽어야 한다
이면과 내지가 한 몸인 그를
몇 장 넘겨보기도 했지만
뒤집을 때마다 생살 타는 냄새가 나는
이 책은 너무 오래 읽어서는 안 된다
그 기록은 물로 쓰고 소금으로 새겨져서
팍팍하고 짤 뿐만 아니라 비릿한
등 푸른 언어와 유선형 문장은 쉽게 타버린다
쉽게 부서지고 쉽게 해져서
가시와 살점이 지글지글 뿜어내는 푸른 바다와
바다의 내밀한 구전을 다 읽지 못하게 된다
슬쩍 넘기다 우연히 본
온몸 빼곡히 쌓아둔 흰 종이들
그를 읽을 때는 그 백지마저 조심스레
젓가락으로 한장 한장 넘겨 보아야 한다
육신을 제본했던 스테이플러 같은 가시가
목구멍에 컥 걸리기도 하는
난해한 이 책은
붉은 혓바닥으로 받들어 읽어야 한다
*시집 『노끈』(애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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