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시들

자반고등어 - 이성목

~Wonderful World 2019. 10. 23. 07:34

자반고등어





이성목

 

 

오래 소장하고 싶다면

이 책은 표지만 읽어야 한다

첫 쪽을 쓰다가 고스란히 백지로 남겨둔

이 육신을 눈으로만 읽어야 한다

이면과 내지가 한 몸인 그를

몇 장 넘겨보기도 했지만

뒤집을 때마다 생살 타는 냄새가 나는

이 책은 너무 오래 읽어서는 안 된다

그 기록은 물로 쓰고 소금으로 새겨져서

팍팍하고 짤 뿐만 아니라 비릿한

등 푸른 언어와 유선형 문장은 쉽게 타버린다

쉽게 부서지고 쉽게 해져서

가시와 살점이 지글지글 뿜어내는 푸른 바다와

바다의 내밀한 구전을 다 읽지 못하게 된다

슬쩍 넘기다 우연히 본

온몸 빼곡히 쌓아둔 흰 종이들

그를 읽을 때는 그 백지마저 조심스레

젓가락으로 한장 한장 넘겨 보아야 한다

육신을 제본했던 스테이플러 같은 가시가

목구멍에 컥 걸리기도 하는

난해한 이 책은

붉은 혓바닥으로 받들어 읽어야 한다

                        


 *시집 『노끈』(애지, 2012)

'퍼온 시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춘수 - 하늘  (0) 2019.10.25
오규원 - 그래 몇 포기...  (0) 2019.10.25
붉은 감잎 - 유진택  (0) 2019.10.22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 - 허형만  (0) 2019.10.18
창호지 - 최태랑  (0) 201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