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아이스’ - 김경주(1976~ )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 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 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 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안의 야경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가고 있다
귀신처럼
*고대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드라이아이스’ 부분 - 김경주(1976~ )
드라이아이스를 만지는 순간, 쩍 들러붙는다. 마치 어릴 적 엄동에 문고리를 잡았을 때처럼. 내면의 전경(全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온몸의 열을 빼앗는 것처럼, 진저리치게 만드는 드라이아이스는, 순도 높은 시간을 몸속에 뿌리내린다. 하여, 그토록 바랐지만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이번 생은 순교(殉敎)할 것이다.
<박주택·시인> 2008.08.02 00:05 입력
‘발’- 김행숙(1970~ )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마음의 잠은 게으름이어서 야금야금 시간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발은, 움직이면서 혀의 달콤함을 물리치고, 몸의 타성을 깨운다. 땀으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여,절망으로부터 생을 구출한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있는 무용수. 꼿꼿이 일어선 척추. 햇빛과도 같아 그 어떤 손으로도 더럽힐 수 없는 힘줄. 온 에너지를 모아 자랑으로,서서히, 태어나는 약동(躍動)의 기쁨. 그러나, 만질 수 없는 것까지 만지느라 늘인 손 때문에 발은 손과 멀어지고, 손이 집착이 되는 순간, 발은 손에서 멀어져 쓰러진 기도가 된다.
<박주택·시인> 2008.08.01 00:0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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