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들, 시인들

‘전선들’ - 이장욱(1968∼ )

~Wonderful World 2009. 1. 16. 07:53

‘전선들’ - 이장욱(1968∼ )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배선공이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고도 팔천 미터의 기류에 매인 구름처럼

우리는 멍하니

상공을 치어다본다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텃새 한 마리가 전선 위에 앉아

무언가 결정적으로 제 몸의 내부를 통과할 때까지

관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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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되고 싶은 그대, 그러나 그리운 그대! 이 자기모순의 실체를 결정적으로 폭로해줄 신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상공을 쳐다보는 구름의 욕망-이 관망이 끝나면 나도 외계의 나를 만나 인터뷰할 수 있을까. 10년 후의 야구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시인에게 시간과 공간은 레고 조각처럼 물질화되어 있다. 시인은 그 조각들을 배열하고 배치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다린다. 그대라는 전류가 집도해줄 이 완고함의 감전사를! <신용목·시인>
2009.01.16 00:53 입력


‘털신’-손택수(1970~ )


 토방 아래 늙은 개가 쥔 할머니 고무신을 깔고 잔다 마실 갔다 와서 탈탈 털어논 고무신을 제 새끼를 품듯 품고 잔다

눈이 내리는데, 올겨울은 저렇게 몇 날 며칠 눈만 내리고 있는데

고뿔이라도 들었는지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뚝 뚝 댓가지 꺾어지는 소리에 가끔씩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면서

뒤꿈치를 꿰맨 고무신에 축 처진 배를 깔고 잔다 차디찬 고무신에 털가죽을 대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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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저 잠에서 깨지 않았다. 할머니의 영원한 잠처럼 달콤하다. 나의 꿈속에는 할머니가 밟아온 이웃집 뜨락과 마을의 외진 고샅과 양지 바른 정자나무가 있다. 푸념이 있고 싸움이 있고 위로가 있다. 꿈속에서도 뚝뚝 댓가지 꺾어진 만큼 세월이 가고 추억이 눈처럼 푹푹 쌓인다. 누구든 저 잠을 탈탈 털어놓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 잠은 우리가 잃어버린 잠이므로 꿰매고 꿰매어 오래 신고 다니고 싶은 털신이므로. <신용목·시인>
2009.01.15 00:5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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