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병-이경림(1947~)
집으로 가는 길, 담 모퉁이에 기대어 있었다.
녹색을 입고 있었지만 빈속이 다 보였다
골 뚜껑을 훤히 열어 놓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이었다
몇몇의 눈발들이 기적처럼
그의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는 너무 깊어진 생각 때문에 몸이 무거운 것 같기도 했다
속엣 것을 다 쏟아내 너무 허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저 아득히 저 너머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예정된 무슨 운행(運行)처럼
나의 두 발이 교차하며 그의 앞을 지나왔다
마치, 그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순간들을 거슬러 와
그토록 빈병이 되어 서 있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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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병은 일을 마친 사람이다. 보고 듣고 먹고 자고 말하고 끓는 뭇 일을 마친 사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순간들을 거슬러 와 무거운 속엣 것 다 쏟어내고 마지막 담 모퉁이에 기대어 아득히 돌아가고 있는 사람. 힘껏 일 다 마친 사람만이 속이 투명히 보이는 녹색옷을 입고 비로소 집으로 돌아간다. 빈병은 늙음이거나 헐벗음이 아니다. 빈병 속으로 기적처럼 흩날리는 눈발 몇 뛰어드는 것 보라. 찬미이다. 빈병은 이제 본집 죽음으로 간다. <이진명·시인>
빈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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