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 - 고은(1933~ )
외삼촌은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갔다
어이할 수 없어라
나의 절반은 이미 외삼촌이었다
가다가
내 발이 바큇살에 걸려서 다쳤다
신풍리 주재소 앞에서 옥도정기 얻어 발랐다
외삼촌은 달리며 말했다
머슴애가 멀리 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상해에 갔다가
북경에 갔다가
만주 지지하루로 갈 것이다
그 다음은
남으로 남으로 바다 건너
야자수 우거진 자바에 갈 것이다
이런 답답한 데서
어떻게 한평생 산단 말이냐
갈 것이다
갈 것이다
나중에 너도 데려다 함께 살 것이다
외삼촌은 자전거를 더 빨리 내몰았다
나는 쌩쌩 바람에 막혀 숨이 막혔다
나의 절반은 외삼촌이었다
스치는 십리길 전봇대여 산의 무덤들이여
그 뒤 세세년년 북국 5천 킬로 무소식의 외삼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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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것이다, 갈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전해 들은 소리인데 신음처럼 주문처럼 달려와 귓불을 때린다. 시인의 절반이 된 바람의 목소리, 대숲을 가로질러. 십리길 전봇대를, 산의 무덤들을 휙휙 지나 달려온다. 북경을 지나 만주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고 대서양·태평양을 건너와 내 얼굴을 때린다. 무슨 전염병처럼 갈 것이다. 또 갈 것이다. 답답한 이 땅에서 어떻게 한평생을 산단 말이냐. 세세년년 바람 속에 묻힌 외삼촌의 무소식이 달려와 뺨을 때린다. <최정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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