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과 귀 틀어막다 - 이문재(1959~ )
그렇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것은
인격이 아니다, 먼 기억도 아니고 책갈피도
아니다, 바람에 뒤켠을 들키는
여름나무의 잎사귀처럼 나를 한순간
뒤집는 것도 불현듯 길을 막아서던
옛사랑이 아니다
이 도시이다, 도처에서
이 도시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란 이 도시의 중얼거림과 속삭임
담화문과 스파트뉴스 사이일 뿐이다
죽음이란 도시와의 대화에서 제외되는 것일 뿐
우리가 이 도시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두 눈과 귀를 열게 한 뒤 이 도시가
우리를 끊임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도시가 내미는 이 희고 고운 손들을
조심하라, 관능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풍경인 것, 세련은 이미 무수한 죽임 위에
버티고 선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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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발로 이 도시를 걸어 다닌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이 도시가 내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들고, 우리의 욕망을 휘황하게 전시하여 나를 걸신들린 거지로 만든다. 이 도시가 무방비인 내게 희고 고운 손을 내밀며 관능의 몸짓으로 날 유혹한다. 죽음의 얼굴을 감추고,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어리조차 세련되게 포장해서 전시해 놓고는 끝없이 욕망하라고, 내 눈과 귀를 닫지 못하게 한다. <최정례·시인>
두 눈과 귀 틀어막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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