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구두-이우열(1946~)

~Wonderful World 2012. 7. 13. 23:03

 

 

구두 - 이우걸(1946~ )



조금씩 지루할 무렵

그가 구두를 사 준 적 있다

구두가 지저분하면 스타일을 구긴다며

구겨진 자신의 스타일은

눈치채지 못한 채


차창 밖에 봄이 와서 꽃들이 수다를 떨고

방금 본 무지개처럼 추억이 선연하다

그 역에 닿으면 먼저

구두부터 닦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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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는 나의 지루함을 잠시 속여주었겠지만, 아마도 오래는 아니었을 것이다. 구두란 어디론가 떠나는 데 필요한 물건이 아닌가. 그의 바람과는 달리 관계는 마음의 문제에서 스타일의 문제로, 점차 옅어져 갔을 것이다. 씁쓸한 생각이지만, 그의 구겨진 스타일이 오히려 나의 감정을 식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의 입성을 돌보느라 바쁜 사람의 해진 속옷이 옆 사람을 슬프게도 화나게도 하듯이. 두 사람은 결국 어느 교차로나 이별의 정거장에 서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지금 옛날의 그를 만나러 가는 것 같다. 꽃들의 수다에 들뜨는 마음, ‘추억’이라는 저 먼 말을 보면 짐작이 간다. 그리고 스타일은 스타일로 갚아야 하는 것, 구두는 곧 휘둥그레진 눈처럼 윤이 날 것이다. 구두란, 어딘가로 만나러 가는 데 필요한 물건 아닌가. 지루함은 이렇게 사심 없는 설렘이 되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치유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영광·시인>

 

구두[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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