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 김혜수(1959~ ) 나무 껍질인 척 나무에 들러붙어 있는 얼룩대장 노린재 앙상한 나뭇잎인 척 돌인 척 모래인 척 숨 참고 있는 나비박쥐, 강변메뚜기 나뭇잎에서 나무껍질로 모래로 돌로 거처 옮기는 동안 아픈 척 죽은 척 더러 사람인 척 보호색을 바꾸는 동안 새빨간 거짓말이 참말이 되면 어쩌나 은폐하고 경계하고 위장해도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 어쩌나 시치미 떼고 딴청 부리다 온통 들켜버리면 어쩌나 낮잠 자다 눈 떴을 때 아무도 없는 정적 속에서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천장의 사방연속무늬인 척 장롱인 척 벽에 걸린 그림인 척 커튼인 척 거울인 척 딴전 피우며 내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 있는 누군가 햇살인 척 바람인 척 척은 보호색, 위장술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척해야 하는 것이다. 은폐하고 경계하고 위장하는 것은 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안간힘이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척은 사람다운 척이다. 사람이 개나 소나 벌레인 척하는 것은 우습다. 우리가 품고 있는 갖가지 동물다운 본성을 경계하고 위장하며 사람다운 척하며 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밖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척이란 없는 것 같다. 자기 욕망을 경계하며 사람다운 척하며 살기, 그러다 보면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 <최정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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