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詩·40 - 산책 - 정진규(1939~ )
라파엘의 집 눈먼 아이들은
하루 종일 눈뜨고 있다가 강아지들과도 잘 놀고 있다가
젊은 봉사자들이 찾아오는 저녁 무렵이면
정말 눈먼 아이들이 된다
찾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온전히 눈먼 아이들이라 믿고 있고
눈먼 아이들은 그래서 예의가 바르다 눈먼 아이들은
그래서, 눈뜬 자들보다 더 확실하게 눈뜨고 있다
언제나 눈뜨고 있다
노을이 아름답다 손목 잡고 산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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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몽매하고 의식은 명료하다거나 눈멀면 보고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은 늘 옳은 걸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장님에게 지혜를 구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전통인 걸 보면. 시인이 보기에 눈먼 아이들은 제 몸 안의 빛을 느끼며 산다. 안을 향해 열린 눈으로 마음을 본다. 그리고 그것이 일러주는 바를 헤아려 사려 깊은 ‘예의’로 표출한다. 맹인은 시력이 없다는 외부의 시선에 포획되지 않고, 아이들은 그 시선을 감지하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배려하기까지 하는 것 같다. 눈먼 아이들은 그러니까 성한 눈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고, 성한 몸이 갖지 못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그것까지 보았을 것이다. <이영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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