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왕국 중독증 - 이면우(1951~ )
TV 모니터 속에서 사자가 사슴을 먹고 있다
바로 직전까지 도망치는 사슴을 사자가 쫓아
다녔다 나는 사슴이 사자 속으로 벌겋게 들어
가는 걸 본다 아니 저런, 꼭 제집 대문 들어가듯 하네
입이 문이면 송곳니는 어서 들어가자고 등 떠미는 다정한 손
아니지 지금 사슴이
사자로 변하는 중이잖아 서로 꽉 붙들렸으니
영락없는 한 몸뚱어리지 그렇게 한 순간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돌연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핏빛 하늘 아래 사반나의 황혼 장엄하다
어린 사슴 따뜻한 사자 뱃속에 들어간
황혼을 탁 끄고 냉장고 열어 내용물 환히 비치는
유리그릇들 어둑한 식탁 위에 늘어놓다가
그 차가움에 감전되듯
사슴이 사자에게 잡아먹힌
저녁의 정체를 비로소 등줄기로 부르르 떨었다.
-------------------------------------------------------------------------------------------------
강자가 약자를 먹는다. 이 자연계의 철칙에는 이상한 자연스러움이 있어 부지불식간에 문명인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사자 입속을 집 안처럼, 송곳니를 다정한 손길처럼 느끼게 한다. 사슴과 사자는 같은 성을 가진 형제거나 한 몸 같다. 저렇게 편안하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잡아먹혀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이 자연의 야만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다. 문명이 자연의 적이듯이 자연도 이렇게 마당에 엄습하는 잡초처럼 문명에 독이 된다. 비참도 흔히 봐서 둔감해지면 무언가 초연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중독 아니랴. 뒤늦게 깨닫게 되는 ‘저녁의 정체’란 그것이 비명과 유혈을 동반한 살육이었다는 사실. 등골에 이는 경련이 뜻하는 바는 그러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자연은 당연이 아니라는 것. <이영광·시인>
'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사 - 맹문재 씨에게 - 김규동(1925~2011) (0) | 2012.08.08 |
---|---|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 이상국(1946~ ) (0) | 2012.08.07 |
몸시40-산책-정진규(1939~) (0) | 2012.08.06 |
여름날의 독서-정희성(1945~) (0) | 2012.08.03 |
무명인-에밀리 디킨슨(1830~1886)/장경희 번역 (0) | 2012.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