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 권혁웅(1967~ )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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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라고 해서 늘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 시를 읽는 것으로, 그래서 그것이 가슴에 불러일으키는 파문을 가만히 만지는 것으로 일을 마쳐야 할 때가 있다. 그 결이 물잠자리 날개 같아서 자칫 잘못 집으면 바스러진다. 그러니, 오늘은 그냥 그 파문이 만드는 동그라미에 슬며시 밀리다가는 함께 무늬지는 마음을 느껴보자. 시란 말이나 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거기 닿아서 무늬지는 그 순간에 산다. 시는 쓰는 자와 쓰여지는 것, 읽혀지는 것과 읽는 자 사이에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 소유할 수 없다. [장철문·시인·순천대교수]
파문 - 권혁웅(1967~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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