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처연한 저녁 - 신용목(1974~ )

~Wonderful World 2012. 12. 28. 01:21

처연한 저녁 - 신용목(1974~ )

 

 

가을 감나무는 한 주먹씩 노을을 쥐고 있다 그 아래 누우면

 

가지 사이사이로 조각조각 비치는,

 

감나무에 걸터앉아 하늘은 무슨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고구마 캐던 어머니가 그 자리

 

고구마순 깔고 앉아 땀을 식히듯

 

문득 일어나는 어머니 뒤에 고구마 잎 몇 장 붙어가듯

 

서쪽으로 걸어간 하늘 그 엉덩이에 남은, 붉은 노을을

 

어머니 대바구니 가득 고구마 이고 돌아오는 발목에, 알 박인 어둠

 

어둠이 넝쿨째 딸려와

 

감나무 환한 가지에 척 걸쳐지는 모양을

 

물 빠진 냇가 나뭇가지가 떠내려온 잡풀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그 물에 낙엽 한 장 떠 붉게 흘러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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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와 노을과 고구마와 어머니와 엉덩이와 고구마순과 발목과 어둠과 걸쳐짐과 낙엽이 이토록 서로가 서로에게 색채와 정서를 건네주고 건네받으며 이어질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이 연상의 맥락이 참으로 처연하다. 마음으로 건너가고 이어지는 사물의 징검돌, 거기서 은유가 피어나고 환유가 태어난다. 감나무 가지에 걸터앉은 하늘과 고구마 잎을 깔고 앉은 어머니, 어머니의 발목에 걸린 어둠과 감나무 가지에 걸쳐진 어둠, 그리고 물 빠진 냇가 나뭇가지가 휘감고 있는 잡풀의 연쇄. 연기적(緣起的)이다. 사물은 마음을 통해서 태어나고, 마음은 사물을 통해서 태어난다. 그것들은 서로 독립해 있지 않다. 이미지의 연쇄는 곧 마음이 건너가는 맥락이다. 신용목은 유비(類比·analogy)를 공들여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시인이다. [장철문·시인·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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