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 권혁웅(1967~ )

안녕, 선우일란
그대를 따라간 청춘은 어느 골목 끝 여인숙에서
새우잠을 잘는지 아니, 손만 잡고 잘는지
시월의 밤은 그대의 벗은 등처럼 소름이 돋는데
그곳의 양은 주전자와 플라스틱 잔에는
몇 모금의 물이 남았는지
안녕, 선우일란
저 네온은 지지직거리며, 뼈와 살을 태우며,
저물어가는데
버즘나무에 핀 버짐처럼
한기 번져가는데
비닐을 덮은 이불이 너무 얇지는 않은지
안녕, 선우일란
토하던 그대 등을 두들길 때
나를 올려다보던 눈길처럼
또 한번의 시월이 흐릿하게 지나가
차가운 담에 기대
벌어진 입술처럼 스산하게 지나가
안녕, 선우일란 어느 골목 끝 여인숙으로
걸어 들어간 발자국 소리여
그때 그 숨죽인 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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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물 장면을 어떻게 촬영했는지 궁금해서 광고를 만드는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과자 를 요구르트에 버무려 촬영장에서 즉석으로 조제한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라면수프도 좀 넣어, 색깔도 리얼하게 반영하면 좋을 것을. 입안까지 넘어온, 절반쯤 소화된 음식물이 요구르트 따위라면 도로 삼키거나 건더기만 남기고자 이빨 사이로 국물을 흘려보내는 연기도 어렵지 않을 것 아닌가. 고충은 배우의 몫이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에게 찾아온다. 요구르트 범벅일 거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우리는 여배우가 아름다워도 그 장면을 보며 일종의 공포마저 느낀다. 술 취한 사람이 아무리 미인이라도 등을 두드려줄 때 토사물을 눈여겨보는 따위의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엽기적인 그녀’의 여주인공은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답지만.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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