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속의 연서 - 서대경(1976~)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雲)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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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손에 쥐는 지름길은 초현실주의의 지혜를 따르는 데 있었다. ‘춤추다’ ‘노래하다’ ‘슬프다’ 같은 동사나 ‘당신’ ‘광대’ ‘바다’ 같은 명사, ‘마르도록’ ‘붉은’ ‘낡은’ 등을 국어사전에서 찾아 개별 리스트로 작성해 놓는다. 논리적 연관성을 무시하고 무작위로 낱말들을 연결한다. ‘바다가 마르도록 춤추다’ ‘당신이 붉어 슬프다’ ‘광대가 낡은 노래하다’로 조합한 후, 다듬어 나간다. ‘바닷물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낡고 비루한 광대가 되어, 당신에게 이 붉은 노래를 토해냅니다’ 따위의 문장이 나올 때까지. 재료의 중요성도 고려해야 했다. 줄 없는 백지 위에 반드시 잉크로 적을 것. 험악한 남자고등학교를 큰 탈 없이 졸업하려고 이렇게 시라노의 운명을 따랐기에 불문과에 입학한 것은 아닐까.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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