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애인 - 정한아(1975~ )

~Wonderful World 2013. 6. 1. 23:28

 

애인 - 정한아(1975~ )

한밤을 펜과 씨름하다

책상에 엎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책상의 이데아도 질료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

책상의 나직한 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속에 세월을 묻고 가슴에 열쇠를 꽂은

숨소리가 나직한 늙은 책상은

내가 사춘기에 칼로 그은 상처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준 책상

나를 잠재워준 책상

내가 후려갈기고 긋고 할퀴고 물어뜯고 종국에

머리를 박아대던 책상,

책상은 나를

제 다리 밑에 숨겨줍니다

거기서 손가락 빨며 눈 빨개지도록 웁니다

 

 --------------------------------------------------------------------------------------------

책상은 다양한 낙서의 공간이었다. 한복판에 조각도로 ‘졸면 죽는다’를 새겨놓은 친구에게 왜 자느냐고 물었더니 졸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한다. 큰 줄로 책상의 반을 나누어 놓은 친구는 윤리시간에 개인주의에 골몰했고, 책상을 도화지처럼 사용한 녀석은 졸업 후 미대에 진학하려 했으나 실기연습이 턱없이 부족했다. 상상력을 맘껏 펼치기에는 책상은 너무 작았으며, 그리고 나면 지우기도 힘들었던 거다. 책상은 출석부나 다름없었다. 농땡이를 치려면 그림자처럼 따라와 발목을 잡곤 했다. 책상은 예상치 못한 시련도 겪어야 했다. 책상의 입장에서 보면, 침으로 얼룩지는 건 참을 만했으나 흘린 음식물은 닦아내도 냄새가 고약했을 것이다. 가끔 책상은 느닷없이 날아오는 이단옆차기로부터 우리의 육신을 지켜주는 보호자이기도 했다. 책상은 우리의 고통을 받아주었고 치부를 감추어 주었으며,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실천할 기회의 장소이기도 했으며, 가끔씩 꿈을 설계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