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다 가자 - 김형영(1945~ )

내가 날마다 오르는 관악산 중턱에는
백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요
내 팔을 다 벌려도 안을 수가 없어서
못이긴 척 가만히 안기지요.
껍질은 두껍고 거칠지만
할머니 마음같이 포근하지요.
소나무 곁에는 벚나무도 자라고 있는데요
아직은 젊고 허리가 가늘어서
내가 꼭 감싸주지요.
손주를 안아 주듯 그렇게요.
안기고 안아주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십년도 한나절같이 훌쩍 지났어요.
이제 그만 바위 곁에 앉아
쉬었다 가는 게 좋겠지요.
프리허그(무료로 따듯하게 안아주기) 운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부터 김형영 시인은 나무 안아주기 운동을 시작한 것 같다. 늙은 소나무 품에 안겨 할머니의 포근한 마음을 느끼고, 젊은 벚나무를 감싸 안고 손주의 어린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와 숲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연의 실체나 다름없으니, 나무의 수액이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영적 교감이라 할 것이다. 이제 나이 들어 바위 곁에서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은 그 몸통과 줄기, 그 꽃과 열매, 그 향기와 냄새에서 삼위일체를 느끼는 관조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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