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 이윤학(1965~ )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몸을 토막 내고
꼬리를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리는 도마. (…)
칼은 엎어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칼을 사랑한다는 것. 도마로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는 것. 당신이 나를 지나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당신이 썰고 자르고 토막 낼 때마다 상처가 파이고 핏물이 고이지만, 내 몸이 둥글게 파여 당신의 품이 되길 원한다는 것. 당신이 작정을 하고 나를 찌를 때면 상처 속에서 당신을 입에 물고 침묵으로 견딘다는 것. 내 몸의 칼자국이 늘어갈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무시무시한 사랑도 깊어간다는 것. <황병승·시인>
짝사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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