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발 - 송경동(1967~ )

천호역을 뚫던 지하철 공사장에서
무서웠던 것은 원청도 감리도 아니었다
지하수가 새어 들어오던 측벽도
비에 젖은 400볼트 홀다선도 아니었다
그것은 목발을 짚고 철일을 하는 김씨였다
아니 철일을 하는 김씨의 목발이었다
난 그의 목발이 말을 걸 때마다 오싹했다
그가 화를 낼 때면 섬짓했고
그가 나서서 일을 도울 땐 멈칫했다
끔찍한 것은 그 목발과 정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가 야단을 맞을 때면 함께 쓸쓸했고
그가 간이숙소 벽에 기대 쉬고 있을 때면 평온했다
잔술 취해 그와 어깨 걸면 참 따스했다
김씨는 무엇도 낳지 못하는 선천성 불구였지만
나무토막에도 힘줄을 세우고 핏줄을 놓아
생명을 불어넣는 기이한 힘을 얻었다
난 그의 힘이 무서웠다
먹고사는 일의 노동을 버팀목 삼아 생의 부조리를 돌파하려는 시도가 노동문학이다. 정식 작가도 아니었던 전태일이 남긴 수기의, 그 왜곡된 노동의 적나라한 고독 고백을 뛰어넘은 ‘노동문학’이 있었을까. ‘시인 전태일’이 썼을 법한 작품. 정상의 보루여야 할 노동이 목발을 짚고 내는 힘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긍정이 그 무서움을 오히려 심화. <김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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