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핑 시들...^~ 82

쌀 - 정현종(1939~)

쌀 - 정현종(1939~) -1985년 가을 다 된 벼가 아닌 가을장마에 물에 잠기니 속상해서 하는 소린데 아직 익지도 않은 벼를 두고 (못자리를 두고 '풍년'을 선전하지 않는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으나) 쌀농사란 논에 서 있는 벼커녕은 타작할 때도 풍년 소리를 해서는 안되며 창고에 넣은 뒤에도 아직 안 되며 쌀독에 부은 뒤에도 안 되고 오직 밥이 되어 입속에 들어간 뒤라야 할 수 있는 얘기일세 이게 어디 쌀에서 끝나는 얘가라요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이 모두 모두 입속에 들어간 밥커녕은 '풍년'이라는 년의 뒷박으로 칠한 분 같아서야!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중에서

비오는 날에 - 나희덕(1966~)

비오는 날에 - 나희덕(1966~)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뿌리를 지니고 있어 비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산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며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엊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 줄 수도 있는 이 비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New Trolls - Adagio (shadows) (Concerto Grosso pe..

휴지에서 사랑을 배울 때 - 권성훈

휴지에서 사랑을 배울 때 - 권성훈 휴지는 묶여 있다 항구에서 떠나기 위해 두루마기 방식으로 얇아질 때까지 얇아져 닦아질 표정이 닦아 낼 표정에게 들키지 않게 사라질 흔적을 지우며 지워진 흔적조차 기척없이 떠 있다 그대는 백지장 보다 가벼운 여백을 가졌다 무게조차 모르는 가벼움과 가벼움마저 모르는 무게를 잘라내도 목숨 건 수평으로 마중나온다 밀어내도 달아나지 않는 밀물같이 버려도 구겨진 웃음을 매달고 있다 제가 거기서 나왔어요 한결같은 속을 풀고 당신을 끊을 때마다 간간이 사랑을 다시 사랑을 배울 때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냐고 물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내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그릇 - 오세영(1942~ )

그릇 - 오세영(1942~ )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사랑하는 여인 - 폴 엘뤼아르(1895~1952)

사랑하는 여인 - 폴 엘뤼아르(1895~1952)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있고 그녀의 머리칼은 내 머리칼 속에 그녀는 내 손과 같은 형태 그녀는 내 눈과 같은 빛깔 하늘 위로 사라진 조약돌처럼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잠겨 사라진다 그녀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어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그녀의 꿈은 눈부신 빛으로 싸여 태양을 증발시키고 나를 웃게 하고, 울고 웃게 하고 할 말이 없어도 말하게 한다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진이전(1959~93)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진이전(1959~93)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었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어 불붙어 벼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중략)...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저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량겁 후에 단지 한 줄기 미소로 밖엔 기억되지 않을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

나는 세상 모를고 살았노라 - 김소월(1902~1932)

나는 세상 모를고 살았노라 - 김소월(1902~1932)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을 나서서 예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다'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은 알았으랴 제석산 붙은 불은 예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의 돌이라도 태웠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