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체를 통과하다 - 고형렬(1954~ )

눈 밖에 나 있는 존재들
직접 들어올 수 없지만 직립의 낯선 빛은
무한의 깊이로 창을 통과한다
선 채 밑바닥 없이 붙어 염파를 뒤흔든다
빛의 얼굴 밑으로 나는 나를 집어넣으려 한다
조용히 착상하는 피안의 그림자 정원
상공을 건너와, 평면이 되는 빛 바닥
먼지처럼 한번 슥, 얼굴을 쓰다듬지만 손바닥으로
너는 즉시 나의 손등을 비춘다
어떤 간절한 마음도, 앞서 가는 광속의 예언도
너의 빛 위에 놓을 수가 없다
너는 이렇게, 직접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유리체를 통과하고 내 의식체를 비춘 뒤
되돌아 나오는 빛 다발이 수없이 거쳐 가도
우리는 서로 다치지 않는다
나는 이미 너의 오랜 영혼에 매료되었고
창밖에 와 혼자 섰다
물(物)이 구체적이고 동사가 움직이고 형용사가 그리고 부사가 더 그리는 것이 이루는 이야기 말고는 그것 말고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없다. 혹시 시인도? 혹시 시인도…. 왜냐면 ‘나는 나를 집어넣으려’ 하지만 ‘너는 이렇게, 직접 들어오지 않는다.’ 시인은 감각 원소(元素)들만으로 갈 수 있는 끝까지, 무심(無心) 너머 무심의 형식에까지 가려 하고, 성공했다. 그 아름다움, 가슴 아파라. <김정환·시인>
유리체를 통과하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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