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따뜻한 흙-조은(1960~)

~Wonderful World 2014. 12. 18. 09:07

따뜻한 흙

- 조은(1960~ )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왔다


씨앗들이 내 몸으로 흐르는

물길을 알았는지 떨어지지 않는다

씨앗들이 물이 순환되는 곳에서 풍기는

흙내를 맡으며 발아되는지

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

내 몸이 낯설다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 뿌리에서 꽃을 보려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는 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내 고통은 그곳에서

샘물처럼 올라온다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첫 연은 단순한 자연친화를 예고하지만, 2연은 놀라운 반전이다, 자연 속으로의. 이것이 물의 요정과 씨앗의 동화를 예고하지만 다시 놀라운 반전이다, ‘낯선 내 몸’ 속으로의.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불모와 따뜻한 흙의 놀라운 변증법이 이룩된다. 회고록과 정반대 시간과 개념의 생애 전체가 동원되어야 가능했던 은유로서 변증법. 마지막은 식물의 비유가 아니다. 흙의 비유도 아니다. 흙을 입은 인간의 비유도 아니다. 가장 따뜻한 인간을 입은 흙의 비유다. 인간 죽음의 소망이기도 할. 불모의 몸에서 시작되어, 이리 짧은 시행으로 이리 멀리까지 온 시가 내가 알기로 이제껏 없었다. <김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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