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 김사인(1956~ )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지고
길은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 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이 시인만큼 생의 태도가 겸손한 사람을 찾기 힘들지만, 이 시에서 그는 생로병사의 슬픔 일체를 간절한 마음의 치열한 단정(端正)에 담아내는 식으로 김수영과 또 다른 길을 내려는 야심이 만만하다. 단정이야말로 그의 가장 튼튼하고 가장 미래지향적인, 그러니까 죽음에 이르는 미학이다. 순환구조가 순환할수록 단정으로 아름다움의 슬픈 깊이를 더해가는 참으로 희귀한 현대시 한 편. <김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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