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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 북한강에서, 촛불,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저 어둔 밤 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속으로 새벽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오 강물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오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

동영상 음악들 2022.01.05

나만 행복하면 안되는데...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요즘의 나는 평온한 마음이 줄곧 한 달 넘게 머물고 있다. 내 인생에 이처럼 내면이 맑게 갠 적이 이렇게 길게 이어진 날들이 있나 싶다. 코로나 정국을 안타까워하고 애처운이들에게 동정의 눈길과 손길도 내밀기도하고, 대선정국의 혼란을 통탄하기도하지만... 나이들어서인지 여기저기 몸이 조금씩 고통을 호소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마음의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내게 치명적인걸 과거 경험을 통해 잘 알기에 마음을 추스르는 일은 늘... 이런 저런 나약한 핑계로 힘들고 버거운 일들을 피하며, 힘들다며 애처로운 이들의 살이를 외면하며, 오지랖 넓게 참견하다 낭패를 많이 당했다는 이유로 비겁해지며, 나이 좀 먹었다고 나이를 계급처럼 여기는가 하면, 앞으로 남은 내 삶의 시간들이 그리 길..

참회록 2022.01.05

나무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나무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탄다'중에서

벼락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벼락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벼락맞아 쓰러진 나무를 보고 처음에는 무슨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나보다 하고 생가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날 쓰러지 나무 밑동에서 다시 파란 싹이 돋는 것을 보고 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나무가 벼락을 맞는다는 것을 나무들은 일생에 한번씩은 사람들을 위해 벼락을 맞고 쓰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누가 나무를 대신해서 벼락을 맞을 수 있겠느냐 오늘은 누가 나무를 대신해서 벼락맞아 죽을 사람이 있겠느냐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중에서

밥그릇 - 정호승(1950~)

밥그릇 - 정호승(1950~)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중에서